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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님, 그것도 못하시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51호 31면

홍은택 칼럼

수영장을 다니지 않는 분은 아마 놀라시겠지만 (ㅎㅎ) 아침마다 이런 풍경이 벌어진다. 묘령의 남녀 십수 명이 수영복만 입은 채 풀 안에서 줄지어 둥그런 원을 그린다. 각자 몸통 양쪽으로 양손을 어깨 높이로 올리고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게 한다. 닭이 날갯짓하기 직전의 동작 같다. 양 옆 사람들의 손바닥에 손바닥을 마주 대고 ‘시~작’ 하는 소리와 함께 부딪치는데 처음엔 좌우에서 두드리는 속도가 다르다가 가속이 붙으면 순식간에 박자가 맞으면서 다다다닥 30번 두드린다. 그런 뒤 양손을 마주 잡고 가상의 구심점을 향해 다리를 들어 올려 물 위에 일제히 드러눕는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싱크로나이즈 선수들이 그리는 연꽃 모양 비슷할 테다. 짧은 순간 고된 연습을 마쳤다는 안도감과 하루가 시작되는 기대감이 밀려온다. 열까지 세고 일어나 서로의 손을 하늘로 치켜 올리며 “하나 둘 셋 파이팅!” 외친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수고하셨습니다” 목례를 나눈다.

어디서나 나이 따져 형 동생 가르고 #존댓말 문제까지 겹쳐 때론 난감 #‘~님’이라 부르는 온라인게임처럼 #기업서도 평등한 문화 보게 되기를

누가 고안해냈는지 모르지만 내가 다니는 청소년수련원 상급반에서 행하는 집단의식이다. 이걸 소개하는 이유는 수영장 다니시라고 유혹하려는 데 있지 않다. 그 특별하면서도 일상적인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왕따당한 아이처럼 회원들이 그리는 원 밖에서 혼자 지켜보고 있다. 의식에 동참하지 않을 뿐더러 수경도 안 벗는다. 벗으면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게 되고 눈을 마주치면 말을 트게 되고 그러다 보면 관계가 시작될 수 있다. 2002년부터 십여 년을 다녔지만 수영장에서 맺은 인연이 없다. 회원들끼리 따로 밖에서 만나는 눈치고 나보고도 가끔 나오라고 하기도 한다.

대인기피증에 걸린 사람 같지만 내가 안 나가는 이유는 전형적인 상황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먼저 이 경우를 생각해 보자. 어쩔 수 없이 일 년에 한 번 정도 나가는 성인농구반의 모임이 있다. 여기서는 내가 최연장자여서 큰 형님이다. 회원들은 나이를 따져서 한 살 차이라도 정확히 형 동생을 가린다. 근데 그 농구반에는 내 아들도 있어서 이상야릇하다. 아들도 나한테 형님이라고 불러야 할지…. 학교와 회사와 같은 공식 조직이 아닌 곳에서 관계 맺는 방법은 태어난 순서에 따라 서열을 정하는 것밖에 없는 듯하다. 그게 나는 싫다. 사회 전체가 의제적인 가족관계의 확장 같다. 가끔 씨족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했나 그런 느낌도 든다. 가족은 계약이 아니라 무조건적 관계다. 윗사람은 베풀고 아랫사람은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꼰대’와 ‘싸가지 없는 놈’이라는 말을 듣게 돼 있다.

농경사회에서는 대가족제도가 노동을 조직하는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지만 대다수가 도시에 사는 지금은 이런 의제적 가족관계가 불편하다. 아파트에서 옆집과 모른 채 지내는 이유도 관계를 트면 바로 의제적 가족관계를 맺어야 하는 무거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낯선 타인 아니면 형 동생밖에 없다. 거기에 존댓말도 관계의 수직화에 한몫한다. 나는 이제 ‘형님, 편하게 말 놓으세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 나이가 됐지만 그런 관계가 아닌데 말을 놓을 경우 심각하다. 우리나라 폭행사건의 절반 이상은 반말 시비가 번진 것이다. ‘나이도 어린 게 반말을…’ ‘너 몇 살이야?’ 이런 대거리는 머릿속에서 쉽게 음성지원이 되실 게다.

호칭과 존댓말로 촘촘하게 위아래가 가려지는 폐단을 가장 많이 의식하고 있는 곳이 기업이다. 직원들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좀먹으면 손해여서 직급을 연상하는 호칭을 없애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나오고 있다. 카카오에서는 영어이름으로 부른다. 김범수 의장이나 임지훈 대표도 브라이언과 지미로 불린다. 정보기술(IT) 업계에서는 스마트스터디처럼 ‘족장’ ‘토마토’ ‘집사’와 같은 닉네임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제일기획은 직원 모두가 프로페셔널이라는 뜻에서 프로라는 호칭을 쓴다. 골프장에서 서로 ‘홍 프로’ ‘김 프로’ 라고 올려주는 게 연상돼 부를 때마다 재밌다. CJ 역시 님으로 호칭하는 제도를 오래 전에 도입했고 삼성전자와 LG전자도 올해 님 문화에 가세함으로써 님이 대세로 자리 잡는 느낌이다.

그런데 하려면 존댓말까지 의무화해야 한다. 님이라고 부르고 상급자가 반말을 쓰면 그리고 야단이라도 치면 더 어색하다. ‘00님 그것도 못해?’ 나도 연하 직원들에게 반말 쓰는 버릇이 있어서 이를 고치기 위해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보통 올림말인 ‘하오’체를 쓰자고 직원들에게 제안했다가 핀잔만 들었다. ‘그것도 못하시오?’ 입에 잘 안 붙기도 하다. ‘사이먼(내 영어이름)이나 하시오’. 기업을 떠받들고 있는 사회 전체에 아직 형 동생 문화가 견고한데 기업만 벗어나기 어렵다.

님 문화가 의외로 자리잡고 있는 곳은 온라인 게임이다.(ㅎㅎ) 롤플레잉게임(RPG)이라는 다중역할수행게임의 경우 온라인에서 낯선 이들과 한 팀을 이뤄야 하는데 이때 서로 님으로 존대한다. 예전 문자채팅으로 대화할 때는 쌍욕이 오가기도 했지만 요즘은 보이스톡으로 음성 대화하기 때문에 예의를 갖추는 편이다. 여기야말로 나이에 관계없이 실력으로 관계가 결정되는 드문 곳이지만 로그아웃하면 다시 형 동생의 현실로 돌아오고 만다.

나는 반창회·동문회·향우회·군대동기모임 가리지 않고 어디도 안 나가서 욕을 먹고 있는데 최근 나가게 된 모임이 있다. 회사 생활만 하다 보니 세상을 모르겠고, 관심의 폭도 줄어드는 것 같아 트레바리라고 하는 유료독서 모임에 한 달에 한 번 나가고 있다. 여기에서는 은택님, 수영님, 성전님이라고 부르는데 묘하게 마음이 편하다. 나이든 입장에서 형 대접 못 받으면 손해일 것 같지만 연소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면 꼰대라는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 그들이 어떻게 행동해도 싸가지 없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나이가 많다고 결정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연소하다고 따라야 할 의무가 없으니 그렇다. 그런 이곳에서조차도 회원들끼리 친해지면 형 동생하는 경향이 나타나서 항상 모임을 할 때마다 님으로 부르라고 주지시키곤 하니 관성이 무섭다. 님은 과연 올 것인가.

홍은택
카카오메이커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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