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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화득과(融和得果) 말라”는 지침 따른 이용호의 작심발언 최후통첩인가, 명분쌓기 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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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회 유엔 총회 참석차 뉴욕을 찾은 이용호 북한 외무상은 25일(현지시간) 북한으로 돌아가는 항공기 탑승을 위해 공항으로 이동하는 차량에 오르는 순간까지 미국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위협과 독설을 멈추지 않았다. 이용호는 이날 “미국이 먼저 우리(북한)에게 선전포고했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해야 할 것”이라며 “미국이 선전포고를 한 이상 앞으로는 미국 전략폭격기들이 설사 우리 영공 계선을 채 넘어서지 않는다고 해도 임의의 시각에 쏘아 올려 떨굴 권리를 포함해서 모든 자위적 대응권리를 보유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누가 더 오래 가는가 하는 것은 그때 가보면 알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이용호 북한 외무상이 25일(현지시간) 숙소인 뉴욕 밀레니엄 호텔 출발에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대통령이 대북 선전포고를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이용호 북한 외무상이 25일(현지시간) 숙소인 뉴욕 밀레니엄 호텔 출발에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대통령이 대북 선전포고를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이용호는 지난 20일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을 ‘로켓맨’으로 칭한 뒤 “북한을 완전히 파괴시키겠다”고 연설한 직후 뉴욕에 도착했다. 이용호는 곧바로 트럼프 대통령을 ‘개’라며 반격에 나섰다. 그는 일정을 하루 늦춰 23일 유엔 총회 연단에 올라 “(미국의)참수나 군사공격 기미가 보이면 가차 없는 선제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의 외교수장이 미국 금융의 심장 뉴욕 한복판에서 연일 미국과 말로 난타전을 벌이며 미국을 향한 위협수위를 더욱 높인 것이다.

이용호 외무상 외교 수퍼볼 유엔 총회 도착에서 출발까지 막말 비난 #"지도자에 대한 비난 묵과시 북한 내부적으로 범죄행위 해당"

이런 이용호의 격한 반응에는 북한 체제의 속성이 녹아 있다는 게 북한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진희관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북한 주민들은 최고지도자를 신(神)으로 여기고 있다”며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참아도 최고지도자에 대한 지적을 참는 것은 금기시하는 게 북한의 정치문화”라고 말했다. 북한 당국자들은 사석에서 “남과 북의 체제가 다른 만큼 상이한 체제를 지적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 지도자(김정은)는 건들지 말라”는 언급을 했다고 한다. 자신들의 지도자에 대한 비판이나 지적을 그냥 넘길 경우 범죄 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다는 얘기다.

실제 북한 주민들은 ‘유일사상 체계 확립을 위한 10대 원칙’을 행동 강령으로 삼고 있는데, 최고 지도자를 신격화하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1974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계자가 된 뒤 작성된 ‘10대 원칙’을 김정은이 집권 이듬해인 2013년 수정했다. ‘10대원칙’은 “김일성·김정일, 당의 권위를 훼손시키려는 자그만한 요소도 절대로 융화득과(融和得果) 하지 말고 비상사건화하여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려야 한다”(3조 3항)고 규정하고 있다. 또 “당의 노선과 정책을 사업과 생활의 지침으로, 신조로 삼고 그것을 ‘자’로 하여 재어 보고 사고하고 행동”(4조2항)하고, “당의 노선과 방침, 지시를 곧 법으로, 지상의 명령으로 여겨야 한다(5조 1항)”고 강조하고 있다. 10대 원칙은 김정은에 대한 표현은 없지만 북한 사회에서 살아있는 권력인 김정은을 김일성·김정일과 동일시하고 있어 김정은에 대한 신격화 조항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이를 고려하면 트럼프 대통령의 김정은 비난을 묵과할 경우, 북한 내부적으로는 ‘부정한 사실과 타협’(융화)하거나 ‘받아 들이는’(득과) 융화득과하는 범죄행위가 된다. 지난 2002년 8월 부산아시안게임 한국을 찾았던 북한 응원단들이 김정은의 사진이 들어 있는 플래카드가 비에 젖은 걸 보고 울며 따로 가져간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 21일 김정은이 직접 나서 “미국의 늙다리 미치광이(dotard)를 반드시, 반드시 불로 다스리겠다”고 한 것 역시 이용호에겐 무조건 받아 들이고 대응해야 할 ‘자’이자 ‘법’으로 여길 사안이었다. 평양에서 훈령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김정은이 직접 반발하고 나선 이상 이용호의 행동 지침이 정해진 것이다. 결국 이용호의 거친 표현과 강한 반발은 지도자에 대한 비난에 대한 불쾌감을 넘어 자동 반응해야 하는 의무였던 셈이다. 정부 당국자는 “외교관들은 통상 출구를 만들어 놓고 발언하는 습관이 있다"며 "하지만 이번 유엔 총회에서 이용호는 '개'와 같은 저속한 표현을 사용하거나, 최후 통첩으로 여겨질 정도의 격한 표현을 되풀이 했다는 점에서 북한이 좌고우면하지 않고 추가 도발을 하겠다는 뜻일 수 있어 북한의 동향을 예의주시중”이라고 말했다.
정용수 기자 nky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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