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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패싱’ 노리는 김정은의 위험한 도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중국의 대북 영향력의 베일이 벗겨지고 있다. 중국은 단둥~신의주 송유관을 통해 북한에 공급해주는 무상 원유와 식량·비료를 바탕으로 막강한 대북 영향력을 보유한 것으로 평가됐다.
이 때문에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의 핵 폭주를 차단하기 위해 중국이 이 지렛대를 쓰도록 고강도 압박을 가해왔다. 급기야 북한과 거래하는 제3국의 개인·기업·금융기관을 제재하는 세컨더리 보이콧 성격의 행정명령까지 동원했다. 북한의 대외무역 90% 이상이 중국과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을 겨냥한 행정명령이다.
정보 소식통은 “중국의 동북 3성이 주로 북한의 주 교역대상이라는 점에서 단기적 파급은 동북 3성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문제는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가뜩이나 취약한 동북 3성 경제가 직간접적 타격을 입으면서 침체의 늪에 빠질 수 있어 중국 당국도 고민이 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순망치한 전략 쓰다 초조해진 중국

중국이 대북 레버리지를 안 쓰는 근본적인 이유는 순망치한의 지정학 때문이다.
6·25전쟁 이후 역대 중국 지도부는 한반도 북부가 동해 또는 한반도 남쪽에서 올라오는 해양세력의 힘을 소모해주는 완충 역할을 한다는 신념을 공유하고 있다.
그간 중국은 핵 개발로 인한 북한의 고립을 적절히 해소해주면서 북한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했다. 이런 조건 아래에서 북핵 개발 과정이 한·미·일 삼각동맹을 견제하면서 역내 세력 균형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중국이 설정한 레드라인인 6차 핵실험을 북한이 강행하면서 북·중 관계에도 파열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핵실험 시점도 묘했다. 중국이 주도하는 연중 최대 외교행사인 브릭스(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신흥 경제 5개국) 정상회의 개막일에 이뤄졌다. 사실상 수소폭탄 실험인 6차 핵실험은 브릭스 뉴스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다. 중국의 위신에 흠집을 내겠다는 의도가 실린 행보라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중앙포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중앙포토]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북한 당국을 통제하기 위해 원유 공급 차단 등 북한 경제를 마비시킬 수 있는 결정적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이 카드를 동원할 경우 반중(反中) 민족 감정을 자극할 수 있고 어부지리를 노리고 눈독을 들이는 러시아에게 그나마 있는 대북 영향력을 뺏길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 체제 붕괴 등 중국이 감내하기 어려운 사태로 급발전할 수 있고 그 경우 한미 동맹에 한반도 주도권을 내줄 수 있어 중국으로선 딜레마적 상황이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WP)는 이런 곤경에 빠진 중국이 북한의 행동과 현 상황에 대해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한석희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당초 전략적으로 대북 영향력을 구사했던 중국이 이제는 카드가 있어도 쓸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로 몰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중국 통제권 밖으로…” 김정은의 '위험한 도박'

중국의 이런 궁색한 처지를 북한이 교묘하게 파고 들고 있다.
이용호 북한 외무상은 지난 23일(현지시간) 제72차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핵개발의) 최종 목표는 미국과 힘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라고 못박았다.
이 외무상이 거론한 ‘힘의 균형’은 전략적 현상 변경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매우 도발적인 발언이라는 평가다. 특히 중국 입장에선 수용하기 어려운 발상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냉전 이후 동북아의 전략 균형은 북·중 동맹 대 한·미·일 삼각동맹 구도 속에서 유지돼 왔다.
미·중 양대 핵보유국의 핵우산 아래에서 세력 균형이 이뤄져온 것이다.
유사시 한·일은 미국 핵우산의 보호를 받게 되고 북한은 중국의 핵우산 속으로 들어간다는 개념이다.
이를 통해 핵확산을 억지하고 역내 세력 균형이라는 현상을 유지한다는 게 미·중의 전략이었다.

지난해 8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북극성-1형의 시험발사를 현지 지도하고 있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위 사진). SLBM에 대한 미국의 ‘확장 억제력’을 보여주기 위해 지난 6월 부산항에 입항한 로스앤젤레스급 핵 추진 잠수함인 샤이엔함. [중앙포토]

지난해 8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북극성-1형의 시험발사를 현지 지도하고 있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위 사진). SLBM에 대한 미국의 ‘확장 억제력’을 보여주기 위해 지난 6월 부산항에 입항한 로스앤젤레스급 핵 추진 잠수함인 샤이엔함. [중앙포토]

이용호의 입을 통해 드러난 김정은 북한 노동당위원장의 의도는 핵미사일을 완성시켜 중국의 지원 없이, 중국의 통제권 밖에서 미국과 핵에 의한 세력 균형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정전협정 당사자로서 북한에 대한 권익을 주장하는 중국으로선 ‘차이나패싱’ 구도를 용납할 수 없다.
북한의 6차 핵실험으로 꿈틀대기 시작한 현상 변경 흐름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중국은 대북 영향력을 쓰는 게 아니라 판의 주도권을 회복하려 할 것이란 전망이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현실적으로 핵 능력이 생긴 북한을 상대로 1950년대 구 소련이 탱크를 앞세워 헝가리·체코를 침략하듯이 힘으로 굴복시키기는 제약이 따른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북한이 핵폭탄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미국은 북한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듯이 중국도 북한을 공격할 수 없는 구조는 마찬가지다.
일각에선 북한이 주도권을 쥐려는 이 판을 뒤집으려면 중국의 선택지는 사실상 김정은 정권의 붕괴와 교체가 유력하다고 주장한다.

유엔의 대북제재에 중국이 동참한 가운데 북한 신의주와 중국 랴오닝성 단둥을 오가는 북한 트럭과 승합차가 크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북중접경인 단둥은 북중교역의 70% 이상이 이뤄지는 교역 거점이다. 사진은 중국 단둥 압록강대교.

유엔의 대북제재에 중국이 동참한 가운데 북한 신의주와 중국 랴오닝성 단둥을 오가는 북한 트럭과 승합차가 크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북중접경인 단둥은 북중교역의 70% 이상이 이뤄지는 교역 거점이다. 사진은 중국 단둥 압록강대교.

"참수부대, 동해 아닌 산둥반도에서 건너올수도"

권오중 외교국방연구소 연구실장은 “미·중간 빅딜에 의한 레짐 체인지의 역학이 작동할 수 있는 구조 속으로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다”며 “김정은 위원장은 영구적 김씨왕조의 체제 보장과 김씨왕조의 멸망 속에서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사태가 극단적으로 흐르면 북한 지도부를 겨냥한 참수부대가 동해 미 항모에서 뜨는 게 아니라 산둥반도에서 건너올수도 있다는 얘기다.
중국의 통제권을 벗어나려는 북한, 좌시할 수 없는 중국의 보이지 않는 갈등이 북·미 말폭탄 전쟁 아래서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충돌의 임계점을 향하는 극한 대치는 북·미가 아니라 북·중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용호 외무상이 유엔 연설에서 “공화국 지도부에 대한 참수나 군사 공격 기미를 보일 때는 가차 없는 선제행동으로 예방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했다. 이 발언은 미국 뿐 아니라 중국까지 시야에 넣고 한 얘기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정용환 기자 narrativ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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