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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사법의 정치화를 경계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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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조강수
조강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조강수 논설위원

조강수 논설위원

나는 1966년생 김형연씨와 나이만 같을 뿐 일면식이 없다. 생각할수록 고약하기 짝이 없다. 현직 인천지법 부장판사이던 그가 지난 5월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직행한 사건(?)에선 나쁜 냄새가 난다. 아무리 고상한 말로 포장하더라도 감춰지지 않는, 권력과 정치를 좇는 사법의 흔적이다. 청와대로 가려고 사표를 낸 뒤 대법원 산하 법원행정처에 “왜 빨리 수리를 해 주지 않느냐”고 독촉했다는 말까지 들렸다. 처음엔 깜짝 놀랐고 곱씹을수록 ‘비정상의 정상(頂上)’이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그의 운신(運身)은 김수천 전 부장판사의 금전욕에 버금갈 만큼 친정인 사법부에는 치명적이다. 누구에게나 공평·공정, 정의로워야 하고 그게 아니라면 정의롭게 보이기라도 해야 하는 사법의 순결성을 심각하게 훼손했기 때문이다.

김형연 판사의 청와대 법무비서관행, 사법의 정치화 첫 단추 #사법 적극주의는 정부·국회 권력을 법원이 견제할 때 빛나

김씨는 2009년 신영철 전 대법관의 사법행정권 남용 논란 때, 최근 ‘양승태 코트(대법원)’의 사법행정권 남용 논란 때 진상조사를 적극 요구했다. 당사자는 어쩌면 “세상을, 사법부를 바꿔 보려고 청와대행을 택했다”고 강변할지 모른다. 그러나 재판의 독립성이 생명인 현직 판사가 그 직을 단숨에 내팽개치고 대통령의 법률 참모로 급변침한 것은 자기부정이다. 이런 사법부를 누가 ‘정의’의 마지막 보루라고 믿고 의지할 건가. 헌법 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 양심에 따라 독립해 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동안 김씨가 재판은 공정하게 했는지, 사법을 국가 동력의 하나쯤으로 보는 건 아닌지도 의문이다. 혹여 김씨가 비서관을 그만둔 뒤 사법 개혁을 한다는 명분으로 법원으로 되돌아오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양승태 대법원장의 후임에 김 비서관이 간사로 있던 국제인권법연구회의 초대, 2대 회장을 지낸 김명수 후보자가 임명되자 ‘사법의 정치화’ 신호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검찰에 이은 사법부의 코드 맞추기 인사’로 해석했다. 그 와중에 인권법연구회 소속인 인천지법 오현석 판사는 ‘재판이 곧 정치’라고 주장해 불을 질렀다. 오 판사는 ‘남의 해석일 뿐인 대법원의 해석 등을 추종하거나 복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도 썼다. 이런 주장은 법 해석이나 판결 시 정치적 목표나 정의 실현 등을 염두에 두는 ‘사법 적극주의(judicial activism)’와 무관치 않다. 미국에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임명한 얼 워런 대법원장이 사법 적극주의를 실천해 국가 권력을 견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워런은 보수 성향이었는데 임명 뒤 진보적 판결을 줄줄이 내놨다. 흑백 차별 폐지 등의 인권 보호 판결이 대표적이다. 아이젠하워가 “그를 대법원장에 임명한 게 내 일생 최대의 실수”라고 했단다.

문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 지난주 서울중앙지법의 국가정보원 댓글사건 관련 영장 기각에 정면 반발한 것도 사법의 정치화와 연결돼 있다. 검찰은 반박문에서 “법과 원칙 외에 또 다른 요소가 (영장 기각에)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의구심도 제기된다”고 적시했다. ‘또 다른 요소’라 함은 ‘정치적 편향성’을 의미한다. 은연중 영장전담판사들을 ‘적폐 판사’로 몰았다.

사법 개혁을 한다며 사법부 수뇌부를 코드 인사로 채우고 그 아래 판사들을 줄 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헌법재판소는 진보·보수와 상관없이 통합진보당 해산을 재판관 8대 1로 결정하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은 전원일치(8대 0)로 인용 결정했다. 이처럼 재판관들이 보편적 가치 기준과 정의감을 갖고 있다면 결론이 산으로 가지는 않는다.

“사법 적극주의는 사법부의 독립과 사법적 통제의 강도를 높이는 태도나 철학을 말한다. 정부나 국회가 보수적이라면 법원은 진보적 성향을, 정부나 국회가 진보적이라면 법원은 보수적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촛불·태극기, 리본·반리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한희원 동국대 법학대학원장) 대통령·대법원장·검찰총장이 동색(同色)이라면 견제는 누가 하고 균형은 누가 맞출 것인가.

조강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