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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레드라인'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 이유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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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3일 오후 청와대에서 북한의 6차 핵실험과 관련한 NSC 전체회의를 주재했다. 사진제공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은 3일 오후 청와대에서 북한의 6차 핵실험과 관련한 NSC 전체회의를 주재했다. 사진제공 청와대

북한이 3일 6차 핵실험을 실시한 뒤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장착용 수소폭탄 실험에 완전 성공했다"고 발표하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7일 설정한 '레드라인'을 사실상 넘어선 것이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94년 클린턴 정부서 첫 대북 '레드라인' 그어 #北 2002년 레드라인 넘었지만 美측 반응 크지 않아 #전문가 "美가 경고하고도 행동 없자 북핵 가속화" #文정부의 레드라인 발언도 북핵 억제 효과 없을 듯

지난 17일 문 대통령은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완성하고 거기에 핵탄두를 탑재해 무기화하는 것"을 레드라인이라고 밝혔다.

청와대 측은 3일 "레드라인이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결합이라고 (문 대통령이) 말했는데 ‘완성 단계의 진입을 위해서’라는 북한의 표현은 아직 완성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라며 북한이 아직 레드라인을 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청와대 측의 설명대로 북한이 아직 레드라인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를 넘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지난 10여년 간 국제사회의 경고를 거듭 무시하고도 체제를 유지해온 북한 정권에는 레드라인이란 말이 더이상 위협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이 북한에 대해 처음 레드라인을 언급하기 시작한 건 1993년이다. 당시 북한이 핵무기비확산조약(NPT)에서 탈퇴하겠다며 핵무기 개발 가능성을 시사하자 빌 클린턴 정부는 북한이 영변 원자로의 폐연료봉을 재처리하는 것을 레드라인으로 설정하고 북한이 이를 넘을 경우 군사행동에 나설 수 있다고 위협했다.

1994년 10월 21일 로버트 갈루치 미국 핵대사(左)와 강석주 북한 외교부 부부장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북·미 고위급회담의 기본합의문에 서명하고 있다.

1994년 10월 21일 로버트 갈루치 미국 핵대사(左)와 강석주 북한 외교부 부부장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북·미 고위급회담의 기본합의문에 서명하고 있다.

당시 북한은 이 위협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북한은 NPT 탈퇴를 유보하고 클린턴 정부와 협상을 개시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영변 핵시설 선제타격을 고려했지만 김영삼 대통령의 결사 반대로 무산됐다. 이듬해 북한과 미국은 북한이 핵을 동결하는 대신 미국이 경수형 원자로 발전소 2기를 건립해주고 경제원조로 연간 50만 톤의 중유를 지원해준다는 내용의 제네바 합의를 체결했다.

그러나 이후 미국과의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2002년 북한은 자신들이 비밀리에 핵연료를 재처리해왔음을 밝히며 핵 동결 해제를 선언하고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공개적으로 가동했다. 기존 합의를 파기한 것은 물론 레드라인을 명백히 넘어선 행위다. 그러나 미국은 이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에 탄력을 받은 북한은 한걸음 더 나아가 2006년 첫 핵실험을 실시했다. 그러나 미국 부시 행정부는 이에 대해 설명을 통해 "북한이 핵무기나 핵물질을 다른 국가 또는 비국가 단체에 전달하는 것은 미국에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되며 북한은 그런 행동에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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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이때 미국이 행동을 취하지 않았던 것이 북한의 계속되는 핵 실험을 조장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프랑스 싱크탱크 전략연구재단의 브루노 테르트레 이사는 "미국이 사전에 경고하고도 행동을 보이지 않은 것이 북한의 핵 프로그램 추진을 가속화했을 것"이라며 "2006년 핵실험 이후 미국이 '핵물질 전달이 위협'이라고 경고한 것을 북한은 핵실험 자체는 해도 된다는 신호로 받아들였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도 북한 타격을 포기한 자신의 결정을 후회한다고 밝힌 바 있다. 지난해 말 홍콩에서 가진 한 비공개 간담회에서 클린턴 전 대통령은 "지금 북한 상황을 보면 당시 (포기) 결정이 두고두고 짐으로 남아 있다"고 밝혔다.

이기준 기자 foridealis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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