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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시평

대통령의 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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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중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잘 짜인 문예 이론서로 알려진 '문심조룡(文心雕龍)'에는 조책(詔策)이란 장(章)을 따로 두어 천자의 말을 다루고 있다. 거기에 따르면 천자의 말은 '신령스러운 또는 신성한 것이며, 병풍처럼 고요히 펼쳐져 있어도 그 소리는 온 세상을 가득 채운다'고 했다. '제후들은 그 말을 본보기로 삼으며 온 세상은 믿고 따른다'고도 했다. 모두 그 말이 지녀야 할 품격과 받아야 할 신망을 규정한 것으로 보인다.

천자의 말이란 권력의 말 또는 지도자의 말쯤이 되며,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의 말에 견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요즘 우리 대통령의 말을 듣고 있으면 그 표현방식을 본받거나 의미내용을 믿고 따르기는커녕 걱정스러움을 넘어 딱하다는 느낌까지 들 때가 있다. 그 가장 가까운 예가 며칠 전 유럽 순방길에 했다는 '미국 사람보다 더 친미적인'사람들에 대한 비판과 우려다.

거기서 먼저 걱정스러운 것은 대통령의 말로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의 각박함이다. 그 같이 극단적인 비유는 똑같은 방식의 응수를 부르고, 결과적으로 그런 응수는 대통령의 권위에 흠집을 낼 우려가 있다. 대통령이 '북한 사람들보다 더 친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까 '미국 사람들보다 더 친미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맞받을 수도 있고, '김정일 정권의 각료보다 더 친 김정일 정권적인' 발언을 하는 각료가 있으니 '미국 사람보다 더 친미적인 발언'을 하는 지식인이 생겨났다고 나올 수도 있다.

'미국 사람보다 더 친미적인'이란 비유가 꾸미려고 했던 원래의 의미내용도 우리가 그렇게 믿고 따를 만한 것 같지는 않다. 아무리 대통령의 말에 믿음을 가지려고 해도 정말로 그런 사람들이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숨어 반민족적 여론을 유도하거나 거꾸로 한.미동맹을 흔들어대고 있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그 말이 뜻하는 바도 대통령의 정치적 장기(長技)가 되어가는 듯한 '편 가르기'의 한 방식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더 크다.

하지만 대통령의 말보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거기서 파생되는 말의 급격한 전락이다. 곧 대통령의 말을 본보기로 삼는 정부.여당 각료나 요인들의 말이 그러하다. 특히 대통령의 입과 혀라 할 수 있는 대통령 홍보수석이 어제 그제 잇따라 쏟아낸 말은 이미 대통령의 말을 대변하는 것으로 듣기에 민망한 데마저 있었다.

보도에 따르면 대통령 홍보수석은 춘추관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한.미동맹 균열 우려' 보도를 두고 언론이 '새로운 안보장사'를 하려 든다고 비판했다고 한다. 시장에 좌판 펴고 앉은 아줌마가 아닐진대 안보장사라니, 이제는 비유의 각박함이 천박함으로까지 내려앉았다. 거기다가 상대가 '그럼, 대통령은 설익은 민족주의에 기대 인기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냐'고 맞받아쳐 올 때 그 난감함은 어찌할 것이랴.

대통령 홍보수석이 모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한 말은 청와대 밖에서 한 말이라 그런지 한층 듣기 거북스러웠다. 몇 번인가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학자나 언론인' 또는 '상당히 어려서부터 미국에 있어서 영어가 편하고 유창한 분'에 대한 비판과 지적이 있었는데, 그와 같은 범주(範疇) 설정방식은 '편 가르기'로 의심받는 대통령의 '친미'발언보다 더 각박했다. 가엾은 사람들, 뭐 때문에 돈 쓰고 시간 들여 미국까지 유학 가서는 내 민족 내 나라에 문제만 일으키는지.

그 밖에 정부.여당의 유력인사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정치적인 발언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오발(誤發)이나 망발(妄發)이 자주 귀에 들어온다. 그 모두가 대통령의 말을 본보기 삼아 따라하다가 그리 된 것은 아니겠지만, 대통령의 말이 엄숙하고 신중하여 나쁠 것은 없다.

천자의 시절은 아니지만 대통령의 말은 분명 '모든 사람이 우러러볼 수 있도록 높은 곳에 있어야 한다(大觀在上)'.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는 어지러운 세상을 평정하고 학문과 예술에 아울러 관심을 기울였던 명군이지만 천자의 말을 쓰는 데는 그리 좋은 평을 듣지 못했다. 그 조서(詔書)에서 기쁨과 노여움의 진폭이 크고, 때로는 감정이 너무 치우치거나 넘치는 데가 있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탈(脫)권위 또는 솔직함과 절제되지 못한 감정을 마구잡이로 드러내는 것은 서로 다르다.

이문열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