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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자유무역 전통, 그 뿌리엔 수백 년 전 한자동맹 정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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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다시 일어서는 발트해 도시들

라트비아 리가의 구도심에 위치한 검은머리형제단 길드 건물. 1334년 지어진 이 건물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됐다가 1999년에 재건됐다. 독일의 미혼 상인들로 구성된 검은머리형제단은 한자동맹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14세기 무렵 리가와 에스토니아 탈린 일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조문규 기자]

라트비아 리가의 구도심에 위치한 검은머리형제단 길드 건물. 1334년 지어진 이 건물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됐다가 1999년에 재건됐다. 독일의 미혼 상인들로 구성된 검은머리형제단은 한자동맹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14세기 무렵 리가와 에스토니아 탈린 일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조문규 기자]

“내 만약 무너질 운명이라면 그대에 의해 다시 세워지리라.”

중앙일보·한국해양수산개발원 공동기획 #세계 최초 역내 자유무역협정 #한자동맹으로 해상무역 꽃피워 #당시 회원도시인 발트해 국가들 #EU 무대로 스타트업 육성 등 협력

지난달 중앙일보·한국해양수산개발원 취재팀이 찾은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 중심부의 검은머리형제단 길드(상공업조합) 건물 입구엔 이런 글이 써 있었다. 1334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됐다가 1999년에 재건됐다.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옛 상인들의 예언이 현대 라트비아인들의 손으로 실현된 셈이다.

검은머리형제단은 독일에서 온 젊은 미혼 상인들의 조합이었다. 리가 해양역사박물관의 큐레이터 아이가 브루체는 “검은머리형제라는 이름이 붙은 건 이집트 출신인 순교자 성 모리스를 수호 성인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들은 재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며 리가, 에스토니아 탈린 등 발트해 연안 도시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설명했다.

13세기부터 400년 지속된 한자동맹

오늘날 세계 최대의 단일 경제권으로 자리매김한 유럽연합(EU)도 그 원류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13세기 세계 최초의 역내 자유무역협정인 한자동맹과 만나게 된다. 한자동맹의 중심 도시였던 북유럽 발트해 인근 도시, 탈린과 리가는 ‘유럽의 번영은 국가 간, 도시들 간의 자유로운 연합과 무역에서 비롯됐다’는 걸 웅변이라도 하듯 수많은 번영의 흔적을 품고 있었다. 올해 초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 국제협약에서 연이어 탈퇴했고, 영국은 고립주의를 택하며 EU를 떠났다. 이런 위기적 상황이 역설적으로 과거 자유무역의 영화가 주는 인상을 더 강렬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한자동맹의 도시들은 자유무역으로 번성했던 과거의 유물과 사료들을 해양박물관에 전시하며 유럽인에게 한자동맹의 정신을 전파 중이었다. 한자동맹의 중심 도시였던 탈린과 리가의 구도심엔 13~16세기 상인들이 이용했던 건물 상당수가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한자동맹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길드 문양도 거리에서 쉽게 만날 수 있었다.

한자동맹은 전쟁과 약탈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던 중세의 혼란기 속에서도 400여 년 동안 지속되며 유럽의 해상무역을 꽃피웠다. 16개국 187개 도시에서 번성했던 한자동맹으로 인한 부의 축적은 서구 문명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며 비약적 발전을 이룩하는데도 핵심 역할을 했다.

한자동맹은 1200년 독일의 항구 도시 뤼베크에서 발족해 서쪽으로는 런던, 동쪽으로는 노브고로드(현재의 러시아 북부 지방)까지 아우르는 역내 자유무역 벨트를 형성했다. 한자동맹의 설립 취지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당시 맹위를 떨치던 해적과 강도들로부터 상인들을 보호하고 안전한 무역로를 확보하는 것, 둘째는 회원 도시들이 서로 믿고 공정한 거래를 할 수 있는 규정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한자동맹 번영의 원동력은 자유와 신뢰”

한자동맹의 회원 도시 간에는 무역 관세가 면제됐다. 규정을 어기면 동맹에서 배제되는 불이익을 받았기 때문에 불공정거래의 관행도 줄었다.

취재팀과 동행한 해양전문가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는 “수많은 국가가 서로 국경을 맞대고 전쟁과 평화를 되풀이했던 유럽에서 한자동맹이 흔들림 없이 400여 년이나 지속된 원동력은 자유와 신뢰였다”고 설명했다.

상인들을 위한, 상인들에 의한, 상인들의 연합체였던 것이 한자동맹의 경쟁력이었다. 도시들 간엔 왕도, 귀족도 없었고 계급과 권위보다 거래를 통한 이득이 우선이었다. 동맹과 관련된 의사 결정은 각 도시에서 파견된 상인 대표들이 모인 의회에서 이뤄졌다.

한자동맹의 구성원들은 이데올로기나 종교도 강요하지 않았다. 당시 절대적 권력을 지니고 있던 국가나 교회가 자신들을 억압하려 들면 저항했다. 때로는 전쟁도 불사했다. 1426년 덴마크의 에리크 왕이 코펜하겐 인근의 외레순 해협을 지나는 외국 국적 배들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자 한자동맹은 덴마크에 전쟁을 선포해 승리했다.

한자동맹의 몰락은 자유무역의 원칙이 흔들리면서 시작됐다. 한자동맹은 그 위세가 막강해짐에 따라 점차 배타적으로 변해 갔다. 외국인 선주의 영업을 금지하고 동맹 상인들의 외국 국적 선박 이용도 막았다. 마침내 한자동맹의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만을 회원으로 받는 규제를 도입했다. 이로 인해 그동안 부를 쌓아 온 대도시와 그렇지 못한 신흥 회원 도시 간의 격차가 벌어지면서 동맹 내에 불화가 발생했다.

한자동맹에 불만이 쌓인 상인들은 비한자권 조합으로 서서히 거취를 옮겼고, 쇠락한 한자동맹은 1669년 의회를 마지막으로 해체됐다.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한자동맹의 유산

한자동맹은 이렇게 사라졌지만 그 속에서 활약했던 발트해 연안의 상공업 길드들은 20세기 초반까지도 명맥을 이어 왔다. 그리고 한자동맹의 전통 역시 이어지고 있다. 과거 한자동맹 회원 도시가 있었던 발트해 연안 국가들은 모두 EU 회원국으로서 역내 자유무역과 이동의 자유를 보장할 뿐 아니라 상호 간 다양한 협력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EU 내에서도 보다 끈끈한 관계를 구축했다. 독일·에스토니아·라트비아·폴란드·리투아니아 등의 국가들이 1997년부터 진행 중인 발트해 지역 개발 프로그램(BSR)도 그중 하나다. 2014년 개시된 3차 프로그램에선 스타트업 육성과 천연자원 개발 및 환경 보호 등 지역 간 협력을 강화할 수 있는 사업이 추진된다.

97년부터 이 프로그램을 담당해 온 해리 에케스탐 BSR 위원장은 “여러 국가의 대표들이 만나 지역 개발의 방향을 논의하다 보면 의견이 다를 때도 많았다”며 “몇 명만 만족하는 결과보다는 모두가 조금씩 불만스러운 결과가 더 낫다는 신념 아래 서로 양보하고 절충점을 찾아나간 게 장기간 협력사업을 진행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설명했다.

리가·탈린=이기준 기자 foridealis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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