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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南人流]미국건축가협회상 받은 건축가, 가방에 꽂힌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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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면

안지용(44) 대표는 서울과 뉴욕에서 활동하는 건축가다. 미국건축가협회상을 두 차례 수상했고 2015년과 2016년 연속으로 한국건축가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건축가 100인'으로 선정된 실력파다. 그런 그가 2016년 돌연 가방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디자인에 소재는 질 좋은 천연 가죽이다. 사실 여기까진 평범하다. 디자인 좋고 품질 좋은 가죽 가방이야 얼마든지 많지 않은가. 그런데 가격을 보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작은 파우치(손에 드는 가방)는 1만~3만원 대, 숄더백은 비싸야 5만원을 넘지 않는다. 디자인과 품질, 그리고 저렴한 가격까지 삼박자를 고루 갖춘 이 가방은 최근 20여 온·오프라인 라이프스타일 편집매장의 대표상품이 됐다. 건축가가 어떻게 이런 가방을 만들 수 있었을까. 아니, 왜 만들었을까. 궁금증에 그를 직접 만났다. 글=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건축가 안지용 대표(매니페스토 디자인랩)는 건축 외에도 바닥에 내려놓아도 머리가 떠 있는 숟가락부터 건물 자투리 공간에 설치할 수 있는 자전거 거치대 등 기발한 생활 속 제품들을 만들어왔다. 이번엔 버려지는 가죽을 이용해 업사이클링 가방 만든다.

건축가 안지용 대표(매니페스토 디자인랩)는 건축 외에도 바닥에 내려놓아도 머리가 떠 있는 숟가락부터 건물 자투리 공간에 설치할 수 있는 자전거 거치대 등 기발한 생활 속 제품들을 만들어왔다. 이번엔 버려지는 가죽을 이용해 업사이클링 가방 만든다.

8월 9일 오후 3시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안 대표의 회사 ‘매니페스토 디자인랩’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자유분방이었다. 사무실 중앙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오디오가 놓여 있고 한쪽 벽엔 작은 텐트가 설치돼 있다. 밤샘 작업을 한 직원들(안 대표를 포함해서)이 잠시 쪽잠 자는 공간이다. 파티션 겸용으로 사용하는 책장 구석구석에 자리잡은 건물 모형들을 제외하고는 만화책 등 온갖 물건이 즐비한 이 공간을 건축사무소라고 바로 알아맞추기 어려울 정도다. 사무실을 쭉 둘러보다 한 곳에서 시선이 멈췄다. 빨강·노랑·갈색의 가죽 가방이 놓여 있는 공간, 그가 만드는 '에이제로'(AZERO)의 가방들이었다.

-질 좋은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가격이 너무 싸다.
버려지는 가죽을 사용한 업사이클링 가방이다. 가죽옷 생산 과정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쓰이지 않아 버려질 날만 기다리는 폐가죽을 사용했기에 이런 가격이 가능하다.

업사이클링 가방 만드는 안지용씨

안지용 대표의 매니페스토 디자인랩이 설계한 서울 명동의 M플라자 빌딩.

안지용 대표의 매니페스토 디자인랩이 설계한 서울 명동의 M플라자 빌딩.

-건축가인데 어떻게 가방을 만들게 됐나.
시작은 2015년 말 미국 유학시절 잘 알고 지내던 지인 회사를 놀러 갔을 때다. 존 바바토스, 바나나 리퍼블릭 등 유명 해외 패션 브랜드에 가죽 옷을 납품하는 회사였다. 그때 회사 창고 가득히 쌓여 있는 가죽을 봤다. 가죽 옷 샘플을 만들기 위해 준비했다가 쓸모 없어져 방치된 가죽 재고라고 했다. 일부를 사용하고 남은 자투리도 있었지만 아예 손을 안 댄 멀쩡한 가죽도 많았다. 어떻게 처리하냐고 물었더니 공간이 차면 한번씩 컨테이너에 담아서 버리는데 그 비용만 300만원이 든다고 했다. 가죽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 텐데 이를 버리기 위해서도 노력과 비용이 또 드는 거다. 비용만의 문제도 아니다. 환경에도 나쁜 영향을 끼친다. 폐가죽을 소각하면 유독물질이 나와 대기 오염을 유발하고 땅에 묻으면 썩어 없어질 때까지 45년은 걸린다. 버려질 위기의 가죽에 가치를 더 해 '덜 버려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또 하나의 조건은 가능한 최소한의 품만 들여야 한다는 것. 그래야 제품을 비싸지 않게 만들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 결과 단순한 디자인의 업사이클링 가방을 만들게 됐다.

-다른 걸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굳이 가방인가.
바로 가방을 만들기 시작한 건 아니다. 처음엔 가죽공예용 DIY 키트를 만들었다. 사무실에 돌아온 즉시 당시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던 트렌드 분석가 이향은 교수(성신여대)와 가죽 활용 방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다 나온 아이디어였다. 이 교수가 최근 직접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하는 수공예 트렌드에 대해 아이디어를 냈고, 그렇다면 이 가죽을 잘라 DIY 키트로 만들면 비교적 적은 노력으로 버려지는 가죽을 줄일 수 있겠다 싶었다. 곧바로 내가 디자인을 했고, 가죽옷 회사인 조우교역이 제작과 유통을 맡았다.

-반응이 어땠나.
잘 팔렸으면 아마 가방이 나오지 않았을 거다. 2016년 1월 DIY 키트를 들고 유럽 3대 라이프스타일 박람회로 꼽히는 프랑스 파리의 ‘메종 오브제’에 나갔다. 일단 거기서는 반응이 좋았다. 해외에서는 DIY를 많이 하는 데다 키트를 예쁘게 디자인했으니 컨셉트가 좋다는 칭찬을 많이 받았다.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로 꼽히는 ‘레드 닷 어워드’와 ‘IDEA’에서 상도 받았다. 그런데 정작 국내에서는 반응이 시큰둥했다.

-이유가 뭘까.
극소수의 매니어 층 외에는 가죽 가방을 직접 만들 수 있는 DIY 제품을 원하지 않았다. 또 관심이 있다 해도 이걸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몰랐다. 이 키트로 만들 수 있는 아주 단순한 가방을 만들어 보여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으로 접어서 꿰매기만 해도 지갑이나 노트북 파우치가 된다고 샘플을 만들어 보여줬더니 반응이 왔다. 하지만 DIY 키트보다는 '그 샘플'을 사고 싶다는 요청이 많이 들어왔다. 업사이클링의 의미나 직접 만드는 것도 다 좋지만 완제품 가방을 사고 싶다는 거였다. 방향을 바꿔 가방을 본격적으로 만들게 됐다.

-가방 디자인은 직접 하나.
초기 디자인은 내가 했고 지금은 회사 디자인팀과 함께한다. 가방이 더 단순해질 순 없을까, 공정이나 디테일을 더 간단하게 만들 수 없을까를 고민한다.

-가방 제조가 힘들지 않나.
디자인은 사실 쉬웠다. 패션 아이템이면서 제품의 개념도 있어서 접근이 쉬웠던 것 같다. 그런데 제작 공정은 만만치 않았다. 그냥 잘라 봉제하면 끝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가죽옷 봉제 공장에 들고 가니 굉장히 당황스러워했다. 옷 봉제와 가방 봉제가 달라 깔끔하게 꿰매기 힘들다는 이유에서였다. 반대로 가죽가방을 만드는 공방과 공장에서는 가죽이 의류용이라 너무 얇아서 안 된다고 했다. 전문가이긴 하지만 한 업에 오래도록 종사하면서 생긴 고정관념이 존재한다는 걸 느꼈다. 가죽이라는 공통된 재료인데도 옷 따로 가방 따로, 생각하는 게 너무 달랐다. 공장과 공방을 찾아 다니며 그분들을 설득하는 데 참 많은 공을 들였다.

에이제로의 ‘체르니백’(왼쪽)과 ‘슈퍼백’. 의류용가죽으로 만들다 보니 기존의 가죽 가방과 다르게부드럽고 가볍다. 가격은 3만9000~4만2000원.

에이제로의 ‘체르니백’(왼쪽)과 ‘슈퍼백’. 의류용가죽으로 만들다 보니 기존의 가죽 가방과 다르게부드럽고 가볍다. 가격은 3만9000~4만2000원.

-가방 외에 다른 제품도 만들었나.
몇 개 더 있다. 건물 옆 자투리 공간에 자전거를 매다는 자전거 거치대(바이크 행어)부터 시작해 머리가 바닥에 닿지 않는 나무 숟가락(하버웨어), 별도의 깨짐 방지 포장이 필요 없는 와인용 종이상자(오리가위), 앞치마 등이 있다. 말하고보니 꽤 많다.

-건축말고 다른 분야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건축이든 제품이든 늘 ‘사람들이 왜 이걸 쓸까, 어떻게 쓸까’란 관점으로 바라보니 그런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잘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만드는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건물이고 제품이고 모두 사람이 사용하는 물건이다. 굳이 건축, 제품으로 나누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나. ‘디자인’이라고 생각하면 하나로 연결된다.

-다시 가방 이야기로 돌아가자. 가방은 잘 팔리나.
사실 놀랄 정도로 잘 팔린다. 처음 예상은 '한 달에 100개 팔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손익분기점을 맞추려면 한 달에 200개는 팔아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지만 사실 폐가죽을 가치 있게 쓰려고 시작한 일이니 많이 안 팔려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2017년 들어 매달 두 배씩 매출이 늘더니 요즘은 한 달에 500개 이상씩 나간다.

-어려운 점은.
온라인 구매자들에게 업사이클링의 특성을 이해시키는 게 어렵다. 폐가죽을 모아 사용하다 보니 깔끔할 수가 없는데 이걸 하자로 보고 반품하는 경우가 있다. 오프라인 매장에서는 오히려 물건을 직접 보고 사니 문제가 없다.

-앞으로의 계획은.
쌓여있던 가죽이 다 소진돼 가고 있어서 브랜드를 앞으로 어떻게 운영할지에 대한 계획을 짜고 있다. 이렇게까지 잘 될지 예상을 못했던 터라 살짝 당황스러운 상태다. 업사이클이라는 컨셉트를 유지한 새로운 제품이나 형태로 변형시키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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