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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스트라도 회사랑 비슷 … 조직생활 서툴면 못 버티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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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해외의 명문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는 한국인 관악기 연주자가 늘어나고 있다. 왼쪽부터 뉴욕필의 손유빈(플루트),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유성권(바순), 오슬로필의 김홍박(호른).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해외의 명문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는 한국인 관악기 연주자가 늘어나고 있다. 왼쪽부터 뉴욕필의 손유빈(플루트),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유성권(바순), 오슬로필의 김홍박(호른).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런 직장이 있다. 출근은 일주일에 이틀.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근무(리허설)하고 저녁에 특별 근무(연주)를 한다. 정규직이고 정년은 68세 혹은 70세. 은퇴 후에는 연금도 지급되고 1년에 몇주씩 해외 근무(투어 연주)를 한다.

해외 교향악단 한국인 관악 주자들 #오슬로 필하모닉 수석 김홍박 #늘 음악 체크 … 집에서도 일하는 셈 #뉴욕 필하모닉 제2플루트 손유빈 #1명 뽑는 데 60명 지원 … 경쟁 치열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 수석 유성권 #8년 근무 … 30년은 더 다니고 싶어

관악기 연주자 김홍박(36·호른), 손유빈(32·플루트), 유성권(29·바순)의 직장 이야기다. 김홍박은 노르웨이 오슬로 필하모닉의 수석, 손유빈은 미국 뉴욕 필하모닉의 제2 플루트, 유성권은 독일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의 수석이다. 연주자들에게 해외 오케스트라는 말 그대로 ‘꿈의 직장’처럼 보인다. 과연 그럴까. 3~8년을 세계적 명문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한 이들에게 실제 생활에 대해 들었다.

입단은 얼마나 어려운가?
손유빈(이하 손)=“제가 2013년 들어간 뉴욕필의 제2 플루트는 35년 만에 생긴 자리였어요. 오케스트라에서 관악기는 숫자가 적으니까 자리 나기가 힘들죠. 60명 정도 지원했는데 10명으로 추리고, 그다음에 4명·2명으로 줄여서 실제로 연주해보는 기간을 거쳐서 선발됐죠.”

유성권(이하 유)=“독일 오케스트라 정년은 68세로 정해져 있지만, 그 전에라도 스스로 실력이 떨어졌다 싶으면 수석 자리를 내놓을 수 있어요. 2009년 저도 그렇게 공석이 된 자리에 오디션을 봐서 들어갔죠. 오디션만 6번에 최종 2명 뽑아서 연주시켜보고 결정하더라고요.”

김홍박(이하 김)=“제가 2015년 들어간 자리는 3년 동안 비어있었어요. 적임자를 찾지 못했던 거죠. 최종으로 오디션 세 번 해서 3명으로 추렸는데 그러고도 못 정해서 오케스트라랑 같이 연주해보고 정했죠.”

얼마나 좋은 직장인가?
=“제 아내는 약사인데 저 보러 ‘도대체 언제 출근하냐’고 해요.(웃음) 하지만 부담이 엄청나요. 특히 브루크너 교향곡 4번처럼 호른으로 시작하는 건 저 하나 잘못되면 오케스트라 전체가 무너지니까요. 집에서 연습실까지 버스로 출근하면서도 음악을 들으면서 체크하고, 새로운 지휘자가 오면 지휘 스타일을 미리 유튜브로 찾아보고요. 그런 것까지 일하는 시간으로 잡아야 하는데.”

=“뉴욕필은 일주일에 연주만 4번이에요. 일주일마다 새 곡을 하는 거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이는 시간이 정말 많아요.”

=“새로운 곡을 할 때면 악보를 펴고 음반을 틀어놓고 제 악기가 나오는 부분을 음반에 맞춰서 연주해봐요. 그다음에 헤드셋 벗고 개인 연습하고 다시 맞춰보고. 정교하게 준비해 가지 않으면 첫 연습할 때 테가 딱 나요. 특히 관악기는 숫자도 얼마 안되고 오케스트라 곡에서도 솔로 부분이 많으니까 해외 연주 가서도 관광도 못해요.”

연주만 잘하면 되나?
=“동료들과의 관계가 아주 중요해요. 옆에서 오보에 연주하는 단원이 브람스를 할 때마다 음정이 조금씩 낮아지는 것까지 파악하고 있어야죠. 외국 오케스트라는 해외 투어도 많기 때문에 조직 생활을 굉장히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회사랑 비슷해요. 오케스트라 연주 끝나고 만날 집에 혼자 가고 그러다가 결국 나가게 되는 사람도 많이 봤어요. 악기 연주를 아무리 잘해도 소용이 없었죠.”

=“규율을 지켜줘야 해요. 자신의 음악적인 자존심은 지켜야겠지만 상식적으로 당연한 일이면 ‘예스’를 할 줄 알아야되죠.”

독주자의 길을 포기해야 하나?
=“예전에는 오케스트라 연주자가 독주자로서 뭔가 부족하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요즘은 그렇지 않죠. 실력 좋고 유명한 연주자들도 명문 악단에 소속돼 있으니까요. 그리고 오케스트라는 안정적이라 솔로 연주를 준비하기가 더 편하고 수월해요.”

=“관악기는 독주자로 연주할 만한 작품 자체가 너무 부족해요. 협주나 독주회만 하면 연주자로 오래 살아남기가 힘들죠. 뉴욕필은 투어 중만 아니라면 개인 연주가 있을 때 오케스트라 연주에서 잘 빼줘요. 오케스트라 때문에 독주에 지장을 받지 않아요.”

후배들에게도 권할 만한 직장인가?
=“예전에는 현악기 연주자들이 외국의 좋은 오케스트라에 많이 진출했죠. 이제는 유럽 작은 도시까지 한국 관악기 연주자들이 많이 나갔어요. 체격과 체력이 변화했고, 무엇보다 정보가 많아졌죠.”

=“사이트 ‘뮤지컬체어스(musical chairs.info)’나 독일 잡지 ‘다스 오케스트라(Das Orchestra)’ 같은 곳에서 해외 오케스트라 채용 정보를 볼 수 있어요.”

=“한국에서 휴가를 보내고 돌아와 베를린의 오케스트라 연습에서 첫 음을 딱 불면 ‘이거다’ 느낌이 와요. 내 오케스트라만이 낼 수 있는 음색에서 오는 편안함. 최소한 30년 더 다니고 싶은 직장이에요.”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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