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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요리선생 내공으로 만든 ‘엄마손 한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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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5호 28면

 ▶수퍼판 주소: 서울 용산구 이촌로64길 61(이촌동 302-64) 장미맨션상가 105호  전화번호: 02-798-3848  영업시간: 평일 및 토요일 오전 11시~오후 10시(브레이크타임 오후 3시~5시30분) 일요일 휴무 주차: 발렛파킹

 ▶수퍼판 주소: 서울 용산구 이촌로64길 61(이촌동 302-64) 장미맨션상가 105호  전화번호: 02-798-3848  영업시간: 평일 및 토요일 오전 11시~오후 10시(브레이크타임 오후 3시~5시30분) 일요일 휴무 주차: 발렛파킹

‘슬리퍼 생활권’이란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슬리퍼를 신고 다닐 만한 거리에 지하철·병원·학교·쇼핑몰 등이 있을 때 하는 말이다.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법정동명 한강로2가동)은 ‘맛집 슬리퍼 생활권’이라 할 만하다. 이곳에선 아파트 골목만 꺾어지면 폼 잡고 차려입지 않아도 수준 이상으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식당이 즐비하다. 특히 이 일대에 집적해 사는 일본인들을 겨냥한 스시·라멘 등 일식집이 풍성하고, 이 때문에 ‘리틀 도쿄’라는 별칭도 붙었다.

강혜란의 그 동네 이 맛집 #<5> 수퍼판

“원래 이촌동이 그랬죠. 나 대학 다닐 때부터 멋 좀 안다 하는 친구들이랑 놀러 왔으니까. 압구정 로데오, 방배동 카페거리가 뜨기 전이죠. 경양식 식당 ‘장미의 숲’이 맨 처음 여기서 문 열었고 카페 ‘14세기’도 유명했죠. 그땐 우리끼리 ‘여긴 외국 같다’ 그랬으니까요.”

우정욱(55) ‘수퍼판’ 대표가 회고하는 30년 전 분위기다. 이촌동으로 오기 전 우 대표는 대치동 요리선생으로 유명했다. 본인 말로는 “서울 토박이 모친한테서 물려받은 솜씨가 시아버지 까다로운 입맛 맞추느라 늘어서” 1990년대 중반부터 동네 주부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고학력·고소득 맞벌이 여성들이 한둘 뿐인 자녀를 뒷바라지하며 ‘집들이 요리’ ‘방과 후 간식’ 같은 것을 섭렵하던 시기였다. 우 대표는 전통 한식보다는 샐러드·함박스테이크·그라탱 같은 이른바 퓨전 요리로 젊은 엄마들을 사로잡았다. 특히 냉장고 속 기본 재료를 활용하는 계량화된 레시피는 ‘입맛은 세련됐지만 손놀림은 서툰’ 커리어 여성들에게 안성맞춤이었다.

“2004년에 이촌동으로 이사 와서도 계속 요리선생만 했죠. 어디 요리학교에서 배우거나 식당에서 수련한 게 아니라서 내가 ‘셰프’라는 생각도 안 했고. 2015년에 타워팰리스(도곡동) 상가 ‘톨릭스’에 메뉴 컨설팅해주다가 주방을 맡은 게 처음이었어요. 내 이름으로 처음 차린 ‘수퍼판’ 음식들은 거기서 이어져 온 게 많아요.”

장미맨션 상가 1층 식당 문을 열자 길쭉한 홀에 일렬로 정렬된 테이블 26석에 손님이 빼곡하다. 오전 11시와 오후 1시로 두 번 나눠 받는 점심 예약은 동네 주민, 외부 식객으로 빈틈이 거의 없다. 맨 처음 주문하는 건 시그니처 메뉴인 서리태 마스카포네 스프레드. 서리태 콩이 보들보들해질 때까지 여러 시간 삶은 뒤 마스카포네 치즈와 섞어 크림 형태로 내는 일종의 전채 메뉴다. 예전엔 바케트에 곁들였지만 요즘은 크래커를 함께 내기 때문에 식후에 커피와 즐기는 이들도 많다. “서리태를 5L짜리 냄비로 나흘에 한 번씩 삶아도 동이 날 정도”로 인기다.

이게 감질나면 상대적으로 푸짐한 사천식 가지찜이나 불고기&낙지 떡볶이로 배를 채우자. 특히 사천식 가지찜은 이름과 달리 중화풍이 아닌 ‘엄마손 가지요리’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포인트는 가지를 튀기는 게 아니라 볶는다는 사실. “가지란 게 볶다 보면 기름이 많이 나오는데 이 기름을 쫙 버리고 다시 쇠고기·꽈리고추·죽순 등과 볶으면 흐물흐물하지도 바삭하지도 않은 나물 같은 식감이 나요.” 중국 소스인 두반장 대신 일본식 된장인 미소를 넣는 것도 담백한 맛의 비결이다.

건축가인 남편이 뉴욕 브루클린풍의 벽돌 타일로 인테리어를 한 이 식당을 어떻게 분류해야 할까. 무국적 선술집이란 명칭이 가능하다면 수퍼판은 ‘무국적 가정식’이라는 별칭이 어울리겠다. 2015년 초 문 연 이곳에선 우 대표가 20년 남짓한 요리선생 경력 중에 개발한 레시피 중 호응이 높은 40여 가지를 만날 수 있다. 그 음식이란 게 한국에서 먹으니 이국적인 맛인데 외국에 나간다면 그리울 한국의 맛이다.

“아유, 이게 한식인지 아닌지 나도 몰라요. 제철 재료로 건강한 음식하면 밖에서 집밥 먹고 싶은 사람들이 오겠지 하고 차린 거예요. 엄마한테 배운대로 북어 죽죽 찢어서 볶다가 ‘여기에 이 소스 넣으면 맛있겠다’ 싶어서 해보니 사람들이 좋아하고. 함박 같은 것도 일본 정통식을 따라하기보다 우리 입맛에 맞게 달지 않고 개운하게 내죠.”

말하자면 우정욱표 한식은 동네 백반집은 식상하지만 뉴코리안 파인다이닝은 어색한, 그 중간의 외식족을 사로잡는다. ‘마음만 먹으면 나도 이렇게 차릴 수 있을 것 같은 메뉴’를 슬리퍼 끌고 가서 폼나게 먹을 수 있으니까. 한쪽에서 가지런한 백발의 노부부가 돋보기를 고쳐쓰며 메뉴를 읽고 있는 사이 다른 쪽 테이블에선 20대 남녀 커플이 와인리스트를 달라고 했다. “같은 집밥 메뉴인데 요즘은 와인 안주로 즐겨들 드신다”고 우 대표가 설명했다.

퇴근 후 집안 식탁에서 와인 곁들이는 게 낯설지 않듯, 한국 집밥 메뉴를 발판으로 각종 주류를 즐기는 ‘코리안 비스트로’ 시대가 열리는 걸까. 점심 계산을 한 뒤 저녁 빵에 발라먹을 서리태 마스카포네 한 통을 포장해서 수퍼판을 나섰다. ●

글·사진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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