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위기의 ‘취준남’]<하>취준생 유혹하는 도박…20대 도박 중독 치료 5년 새 3.4배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메가 잭팟 297,676,846원’

강원랜드 카지노에 취준생 등 20대 늘어 #도박 중독 환자 20대>40대 이상 전체 #'3박자' 갖춘 사설 토토는 도박 블랙홀

지난 11일 저녁 강원랜드 카지노 안에서 취업준비생 김모(26)씨가 슬롯머신을 뚫어지라 보고 있었다. 그는 자릿수도 세기 힘든 숫자들이 별처럼 박힌 전광판 아래에서 한 손 가득 5만원권 지폐 묶음을 들고 있었다. 김씨는 “취업도 잘 안 되고, 남들은 휴가철을 즐기는데 나도 머리나 식힐 겸 잠시 쉬러 왔다”고 말했다. 그는 “혹시 잭팟이라도 터지면 이력서 쓸 필요도 없이 바로 인생역전 아니냐”며 웃었다.

강원랜드 슬롯머신. [사진 강원랜드]

강원랜드 슬롯머신. [사진 강원랜드]

매장에는 김씨와 같은 20~30대 젊은 남성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종일 카지노에 있었는지 에어컨 바람을 피하기 위해 담요를 두르고 다니는 남성들도 있었다. 이곳에서 5년간 근무한 딜러 박모(27)씨는 “확실히 예전보다 내 또래의 젊은 남자들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그는 “일부는 거의 이곳에 ‘출근’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덧붙였다.

20대에겐 어울리지 않는 공간으로 여겨졌던 도박장에 취준생들의 발걸음이 늘고 있다. 이들의 도박에 대한 관심은 온·오프 라인을 가리지 않는다. 「대학생 도박문제의 실태와 대응방안」 등의 논문을 쓴 김영호 을지대 중독상담학과 교수는 “현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마지막 창구로 취준생들이 도박을 택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지난 수년간 사회 전반에 짙게 깔렸던 헬조선ㆍN포세대(여러가지를 포기하는 세대)ㆍ금수저론 등의 담론이 불안ㆍ우울감을 키웠고, 취업전선에 내몰린 청년들에게 일확천금만이 유일한 희망으로 남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취업준비생들은 당장 친구들보다 경제적 능력이 부족해 자존감이 낮아진 데다가, 온라인 도박은 집 안에서도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쉽게 빠지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20대 도박 중독 환자 3.4배로…40대 이상 전체 환자 수보다 많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도박 중독으로 병원을 찾은 사람 1099명 중 20대(366명)와 30대(418명)는 전체의 71.3%를 차지했다. 5년 전 51.6%보다 약 20%포인트 늘어났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특히 20대는 2012년 108명에서 지난해 366명으로 환자 수가 3.4배가 됐다. 40대 이상 전체 환자 수를 합친 것(343명)보다 많은 수치다. 평가원 관계자는 “전 세대에서 도박 환자 수가 미미하게 감소하는 상황에서 20~30대만 급격하게 늘고 있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도박 중독은 불안ㆍ우울감과 비례한다”고 말했다.

‘3박자’ 갖춘 불법 스포츠 도박, 취준생 끌어들이는 블랙홀

젊은층이 가장 많이 빠지는 도박은 ‘사설 토토’로 불리는 불법 스포츠 도박이다. 한국심리학회가 2014년 펴낸 논문 「대학생의 스포츠토토 경험 유형에 따른 도박중독 심각성에 대한 차이 연구」에 따르면 사설 스포츠 도박 사이트 전체 가입자 중 34%가 20대 대학생이다.

사설 스포츠도박은 IT 기술의 발전, 스마트폰 확산 등으로 2012년 조사보다 3~4배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금액으로는 2012년 7조 6000억원에서 2015년 21조 8119억으로 규모가 커졌다.

한 오피스텔에 마련된 불법 스포츠 토토 사이트 관리 장비. [중앙포토]

한 오피스텔에 마련된 불법 스포츠 토토 사이트 관리 장비. [중앙포토]

2011년 군 전역 후부터 지난해 취업할 떄까지 사설 토토에 빠졌던 김모(27)씨는 “아는 형 권유로 했던 게임에서 첫판에 25만원을 번 게 화근이 됐다. 대출이 쌓여 빚이 5000만원까지 늘었었다. 스마트폰도 여러번 내던져 깨뜨리고, 자살까지 생각했다. 지난해 부모님이 돈을 모두 갚아주고 취업을 통해 자리를 잡지 못했다면 아직도 빚을 만회하겠다고 밤낮 토토만 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임정민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 예방교육과장은 “사설 토토는 20대 남성들이 특히 좋아하는 3박자를 모두 갖춰 급증하고 있다. 3가지는 스포츠 기반, 온라인 게임과 유사한 인터페이스, 경쟁 심리 자극 등이다”고 분석했다.

사설 토토는 시스템이 해외에 갖춰져 있고, 점조직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적발이나 검거가 다른 도박에 비해 어려워 광범위하게 전파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년들이 한탕주의 더 쉽게 빠지는 것을 막으려면 도박과의 연결 고리를 파단하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영호 교수는 “본인이 느끼는 ‘헬조선’에서 당장 벗어날 요량으로 한탕주의에 빠지는 것은 진짜 지옥으로 떠나는 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어 “도박은 절대로 청년의 희망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고 말했다.

김준영 기자 kim.junyou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