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선 2035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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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노진호
노진호 기자 중앙일보 대중문화
노진호 문화부 기자

노진호 문화부 기자

지난달 이병태(57) KAIST 교수의 페이스북 글은 ‘헬조선 논쟁’을 불러오며 적지 않은 청년들의 분노를 샀다. 글을 간추리자면 “우리 땐 더 힘들었으니 헬조선이라고 징징대지 말고 그 시간에 더 공부하라”였다. ‘답답한 마음에 충격요법을 줘 청년들을 다독이려는 거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기다리기라도 한 듯 “우리가 일군 걸 편히 누리면서 힘든 척 마라”며 동조하는 어른들을 보자니 화가 치밀었다.

청년 세대가 느끼는 헬조선의 원인은, 사라진 가능성이다. 무(無)에서 시작해 성실히 일하면 최소한의 성취가 있었던 앞 세대와 지금은 다르다. 앞 세대 노력을 부정하는 것도, 그들이 편했다는 것도 아니다. 최소한 그때는 콩 심은 데 콩 나니 ‘잘살아 보세’ 외치며 일해, 고도성장의 보람은 느낄 수 있지 않았냐는 얘기다.

지금은 어떤가. 물질적 풍요는 어느 때보다 넘치지만 내 콩 심을 땅 한 뙈기 찾기 힘들고, 노력하면 결실을 볼 수 있다는 믿음도 사라졌다. 어렵게 쌓은 스펙으로 수백 대 1 경쟁률을 뚫고 대기업에 취업해도 듣는 얘기라곤 비전 대신 “옛날엔 말이야”라는 회상이 대부분이다. 이러니 힘들게 들어가도 1년 안에 그만둔 이의 비율이 지난해 27.7%(한국경영자총협회)고 심지어 매년 늘고 있다. 배가 불러 중소기업엔 안 들어간다 탓하지만 기어코 대학에 보내 눈을 높여 놓은 것도, 대기업 중심 성장으로 중소기업을 빈약하게 만든 것도 결국 앞 세대가 만든 시스템이었다.

청춘들이 그렇게 무기력한 것만도 아니다. 청춘의 고충을 다루는 예능 ‘열정 같은 소리’의 최지영 PD는 최근 길거리에 나섰다가 놀랐다고 한다. 고충을 듣고자 ‘나는 OO하는 청춘이다’는 문장을 채워 달라 했더니 생각보다 희망을 말하는 이가 많았단다. 최 PD는 “20대 대학생들이 ‘나는 아직 한국에 희망을 바라고 있는 청춘이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부딪치는 청춘이다’ 같은 말들을 쏟아내는데 내가 다 힘이 나더라”고 말했다. 헬조선을 외치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애쓰는 게 지금의 청년들이란 얘기다.

그동안 우리는 성공한 이의 자수성가 신화를 너무 쉽게 믿어왔다. 하지만 뜯어보면 운과 사회적 상황 등 외부 영향 없이 성공한 이는 없다. 실패와 좌절도 마찬가지다. 혼자 나약해 좌절하고 힘들어하는 개인적 좌절은 없다. 그러니 앞뒤 자르고, “징징댈 시간에 더 공부하라”며 청년에게 책임 떠넘기지 말라. 청년들이 품은 마지막 희망까지 놓아버리면, 그땐 정말 ‘헬조선’이 될지 몰라 하는 얘기다.

노진호 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