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인종차별주의 '족쇄' 풀었다"

중앙일보

입력 2017.08.15 16:31

미국 버지니아주 샬러츠빌 폭력사태의 원인으로 지목 받는 백인우월주의를 반대하는 집회(왼쪽).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인종차별주의는 악”이라고 말했다. [AP=연합뉴스]

미국 버지니아주 샬러츠빌 폭력사태의 원인으로 지목 받는 백인우월주의를 반대하는 집회(왼쪽).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인종차별주의는 악”이라고 말했다. [AP=연합뉴스]

 백인우월주의자들의 폭력 집회로 3명이 숨진 미국 샬러츠빌 사태가 가뜩이나 지지율이 떨어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옥죄고 있다. 미국 사회의 인종주의가 수면 위로 부각하는 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역할이 컸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면서다.

지지 기반인 백인 블루칼라 챙기는 트럼프
차별과 혐오로 쌓은 인기가 미국 갈라
"인종차별주의는 저절로 사라지지 않아"

20년간 '일상적인 인종주의(everyday racism)'을 연구해온 에릭 놀즈 뉴욕대 심리학 교수는 "악랄한" 형태의 인종차별주의가 특히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해방되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WP)에 말했다. 트럼프로 인해 "족쇄가 풀렸다"는 것이다. 그는 "만약 대통령이 나치즘이나 백인우월주의에 대한 명확한 비난 입장을 밝히지 않는다면, 무언가 사람들에게 인종적 적의를 전달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미 연방수사국(FBI)와 국토안보부는 지난 5월 합동 정보 공개를 통해 백인우월주의자가 미국 내에서 가장 기승을 부리는 극단주의 세력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2000년부터 2016년까지 26건의 공격으로 49명이 숨졌다. 이는 무슬림 극단주의자에 의한 미국 내 피해의 약 2배에 달하는 수치다.

트럼프는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테러 방지를 위한 무슬림 입국 금지', 이민자를 막기 위한 '멕시코 장벽 건설' 등 반이민·차별 정책을 추진해왔다. 그의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는 미국 국내에선 자신의 지지 기반을 강화하는 '백인 블루칼라 우선주의'로 작동해왔다. 당초 샬러츠빌 사태 직후 "여러 곳(Many sides)의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피해자들에게까지 책임을 돌리는 듯한 애매모호한 발언을 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정치권을 비롯한 사방에서 비난 여론이 쏟아지자 사태 발생 이틀이 지난 14일(현지시간)에야 "인종주의는 악"이라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폭력 사태를 주도한 쿠 클럭스 클랜(KKK·백인우월주의 단체)와 신나치 등의 혐오단체를 지목해 "범죄자이자 폭력배"라 규정하고 "인종차별은 미국에 설 자리가 없다"고 덧붙였다. 또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며, 서로에 호의를 보이고 모두 함께 증오와 편협, 폭력을 규탄해야 한다"고 말했다.

백인우월주의, 혐오단체의 폭력사태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과 마이크 펜스 부통령의 미온적 대응에 항의하는 미국 시민들. [AFP=연합뉴스]

백인우월주의, 혐오단체의 폭력사태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과 마이크 펜스 부통령의 미온적 대응에 항의하는 미국 시민들. [AFP=연합뉴스]

하지만 두번째 성명의 진정성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성명 발표 이후 CNN 기자가 입장 표명이 늦어진 이유를 묻자 트럼프는 "나는 진짜 뉴스를 좋아하고 가짜 뉴스를 싫어한다. 당신들은 가짜 뉴스"라며 답변을 회피했다. 몇 시간 뒤엔 트위터에서 "샬러츠빌에 대한 추가 성명을 발표했는데 '가짜 뉴스'는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진짜 나쁜 사람들!"이라고 불평했다.

트럼프는 케네스 프레이저 머크 CEO가 대통령 제조업자문위원회에서 사임하자 곧장 트위터에 "바가지 약값을 낮추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될 것"이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머크는 미국을 대표하는 제약회사다. 프레이저는 백인우월주의자들의 폭력사태에 대통령이 미온적으로 대응한 데 대한 항의 표시로 사퇴했다. 그는 자문위원회 중 유일한 흑인이었다.

샬러츠빌에서 8월 11일 열린 백인 민족주의 그룹의 횃불 집회. [AP=연합뉴스, Mykal McEldowney/The Indianapolis Star]

샬러츠빌에서 8월 11일 열린 백인 민족주의 그룹의 횃불 집회. [AP=연합뉴스, Mykal McEldowney/The Indianapolis Star]

샬러츠빌 집회에 참여한 극우 리더 중 하나인 리처드 B.스펜서는 "인종주의는 악"이라는 대통령 성명에 대해 "주일 학교 선생님 같은 소리로 들렸다"면서 "트럼프는 멍청이가 아니다. 멍청이들이나 성명 문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거라 생각한다"고 뉴욕타임스(NYT)에 말했다. 트럼프의 진심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NYT는 트럼프가 전임 대통령들처럼 '천사의 언어'를 사용할지, 대선 캠페인 때처럼 차별과 증오의 언어를 사용할지 기로에 서 있다고 지적했다.

백인이 미국 인종 구성에서 소수로 변화하는 상황을 연구해온 예일대학교 제니퍼 리처슨 사회심리학 교수는 WP 인터뷰에서 "젊은 백인들은 노년층과 비슷한 인종적인 편견 반응을 보인다"면서 "남부지역의 (인종차별적인) 노인 세대가 세상을 떠나면 저절로 사라지고, 젊은 세대는 진보하리라는 건 착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인종차별주자가 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렇게 (인종주의자가) 된다"고 말했다. 적극적인 차별 금지 교육을 시행하는 등 사회적 환경을 바꾸지 않는 한 인종주의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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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기자 dung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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