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부자의 품격이란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544호 30면

일상 프리즘

어렸을 때 독일 사람들은 담배를 피울 때도 다섯 사람이 모여야 성냥 하나를 켠다는 얘기를 들었다. 투철한 절약 정신에 진짜 대단하다고 느꼈다. 어느 정도 자란 후에는 그 말이 진짜일까 하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다.

그 후 독일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진짜로 독일 사람들은 절약이 몸에 뱄다는 느낄 기회가 많았다. 밀레는 가족회사로 4대째 내려오고 있어서 공동소유주인 밀레와 진칸 가문에 재산이 많이 쌓여 있다. 라인하르트 진칸 회장은 독일 부자를 선정할 때 늘 10위권 안팎으로 꼽힌다. 어느 날 회장이 저녁식사를 하자고 집으로 초대했다. 간단한 뷔페식으로 준비했는데 회장의 접시를 보니 조그마한 빵 조각이 얹혀 있었다. 빵을 다 먹지 않고 남겼나 보다고 생각했다. 식사 마지막 무렵에 그는 남은 빵을 2~3쪽으로 나누더니 접시에 남은 양념을 깨끗이 닦아 먹었다. 거의 설걷이가 필요 없을 정도인 그 접시를 거의 전쟁터 수준인 내 접시와 비교하니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조금 친해진 뒤에 그 일에 대해 물었더니 씩 웃으며 “어렸을 때 부친으로부터 2차대전 직후 감자 하나 먹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계속 들어서 음식을 아끼는 습관이 몸에 뱄다”고 들려줬다.

한번은 한국을 방문한 회장이 인터뷰 사진을 찍는데 뒤에서 보니 바지의 뒷주머니 부분이 약간 찢겨져 있었다. 그 말을 해 줬더니 “그래? 사진은 뒤가 안 나오니까 괜찮다”고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놀라운 부분은 어디 걸려서 찢어진 것이 아니고 낡아서 해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손꼽히는 부자가 저렇게 소탈하게 사나 하며 계절별로 준비된 양복이 걸려있는 내 옷장이 떠올랐다. 회장이 손수 운전을 하고 다닌다는 점도 의외였다. 독일 본사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것도 여러 번 봤다. 한번은 필자가 머물고 있는 호텔로 자전거를 타고 오기도 했다. 저녁 자리에서 와인이나 맥주를 좀 마실 수도 있어서 차를 놔두고 왔다고 한다. 유사시에 자전거는 놔두고 집사람이 와서 자신만 데리고 가면 된단다.

독일에서 같이 골프를 치는데 동반자가 친 공이 시궁창으로 날아간 적이 있다. 회장은 시궁창으로 가더니 손으로 휘저었다. 민망해서 그만두라고 말리는데도 기어이 공을 찾아내고는 엄청 기뻐한다. 아직 쓸 수 있는 공이고, 떨어진 곳을 봤는데 왜 찾지 않느냐는 것이다. 회사 비용 처리도 깐깐하다. 한국 방문단이 독일 본사와 공장을 방문할 경우 투숙한 방에 넣어 주는 초콜릿 비용까지 한국 법인에 청구한다. 비용을 계산해서 청구서를 만들어 보내는 인력과 시간이 더 들 것 같은데 규정 그대로 지킨다. 당장 손해라도 규정을 고칠 때까지는 지켜나가는 원칙주의가 오늘의 독일을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현직에 있을 때는 그냥 가볍게 봤던 일들이 이제 시간의 여유를 갖고 되돌아보면 참으로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준다. 나도 모르게 따라하는 경우도 있다. 뷔페 식당에 가면 접시에 조금씩만 담아 남기지 않으려고 한다. 양념이 섞이지 않아 음식 맛도 좋다. 물론 바쁠 때야 한 번에 급히 먹어야 할 수도 있겠지만 자유인이 된 지금 한두 번 더 음식을 가지러 간다고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안규문
전 밀레코리아 대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