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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과 상감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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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용환 중앙SUNDAY 차장

정용환 중앙SUNDAY 차장

이달 초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앞에 두고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언급했다는 ‘선혈(鮮血)’ 얘기는 내력이 있다.

1992년 4월 18일자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사설에서 북한을 ‘선혈로 뭉친 혁명 동지’라고 표현했다. 당시 일본 지지통신은 오랜만에 이런 표현이 나왔다고 강조했다. 중국은 북한을 달래곤 할 때 혈맹을 뜻하는 이런 수사를 써왔다. 당시 상황은 그해 8월 한·중 수교를 앞두고 북한의 물밑 외교전이 치열하던 때였다. 이렇게 북·중 관계의 지렛대로서 나름 족보가 있는 선혈이란 말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이 더 많이 역할을 해달라”는 문 대통령의 요청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나왔다고 하니 쓴웃음이 난다.

북한에 대한 중국의 혈맹 관계 인식의 바탕에는 상감령(上甘嶺) 전투가 있다. 상감령은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삼각고지와 저격능선 일대를 부르는 중국식 지명이다. 중국 공산당은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대항해 북한을 돕는다)를 내걸고 6·25전쟁에 참전했다. 51년 7월 휴전 협상이 시작되자 중공군은 상감령에 땅굴 진지를 구축했다. 협상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전략 요충지 사수에 나선 것이다. 52년 10~11월 43일간 백병전 42회, 고지의 주인이 12차례 바뀌는 일진일퇴 끝에 중공군은 삼각고지와 저격능선의 한 개 고지를 점령했다. 미군 7사단과 함께 공방에 나선 국군 2사단은 도중에 미군이 빠지자 이 전투를 도맡아 저격능선 일대의 2개 고지를 탈환했다. 중국은 이 전투를 항미원조를 대표하는 전투로 포장했다. 며칠 안 됐지만 미군과 맞붙었고 북한의 전략 요충지를 피 흘려 지켰다는 점에서 항미원조의 개념에 맞아떨어졌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고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의 주제가 ‘나의 조국’은 대형 국가 행사 때마다 연주되며 혈맹의 기억을 재생산했다.

지난달 중국 공산당 선전부 산하 매체들은 중공군 정치조직부장으로 상감령 전투에 참전했던 런룽(任榮)의 타계 소식을 전했다. 런룽은 정전협정 협상에도 참여했다. 런룽의 사망 뉴스를 통해 정전 협상과 맞물린 상감령 전투와 북·중 혈맹 관계가 시 주석의 의식 속에서 강렬하게 되살아났을지 모를 일이다.

오늘은 정전협정 체결 64주년인 날이다. 정전협정의 연관검색어인 상감령 전투, 북·중 혈맹은 소리 없이 중국인들의 뇌리에서 꼬리를 물고 있을 것이다. 정전협정의 한 축인 중국과 수교해 지난 25년간 경제·인적 교류가 폭발적으로 성장했음에도 상감령이 가로막고 있는 한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로 인한 갈등에서 보듯 한·중 관계의 기대치는 딱 거기까지만이다.

정용환 중앙SUNDAY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