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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에 휩싸인 '글로벌 다문화 수도' 런던은 지금 동상이몽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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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옥스퍼드스트리트 쇼핑가의 정류장에서 다양한 국가 출신들이 빨간 2층버스를 타고 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런던 옥스퍼드스트리트 쇼핑가의 정류장에서 다양한 국가 출신들이 빨간 2층버스를 타고 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오빠, 서랍장 위에 내 카드 있을 텐데 좀 찾아봐 줘.”
지난 13일(현지시간) 오후 영국 런던 옥스포드 서커스역 인근 쇼핑가. 똑바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인파로 넘치는 거리에서 한국어가 들렸다. 젊은 한국 여성 관광객이 휴대전화로 통화 중이었다. 인근 정류장에서 런던의 상징인 빨간 이층버스를 기다리는 이들의 피부색은 다양했다. 동남아시아 출신의 아시아인들과 흑인, 백인 등이 섞여 있었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오는 이들 사이에선 영어,프랑스어, 중국어,일본어, 인도어,이탈리아어 등 온갖 언어가 튀어나왔다.

행정ㆍ문화ㆍ금융 등 워싱턴ㆍLAㆍ뉴욕의 특징 모두 갖춰 #지하철서 듣는 각 국 언어…270개국 출신 모인 다문화 도시 #브렉시트 향배 불투명 속 런던 시민들 낙관과 우려 교차 # # “영국 이익 위해서도 큰 변화 불가능. 장기적으론 더 세계화" # “EU 등 외국인 취업 어려워질 것" 이미 고급 인력 탈출 시작 # 물가 인상에 협상 따라 유럽행 결정파 늘고 인종주의 심해져

 런던은 21세기 ‘세계의 수도’로 불린다. 뉴욕타임스(NYT)는 “백악관이 있는 워싱턴과 국제 금융의 중심인 월스트리트, 브로드웨이의 뉴욕, 할리우드가 있는 로스앤젤레스의 특징을 모두 가진 곳이 런던”이라고 표현했다. 영국 행정의 중심이면서 뮤지컬 등 공연장이 즐비한 웨스트 앤드와 글로벌 금융기관의 허브인 런던 시티가 자리 잡고 있어서다.

 런던은 다문화의 도시다. 270개국에서 온 870만명이 거주 중이다. 개방과 관용이 런던의 경쟁력이 됐다. 2차대전 후 감소하던 런던의 인구는 2000년부터 증가세다. 런던의 1인당 생산액은 1997년 2만 파운드에서 2013년 4만 파운드로 뛰었다. 세계 부호들은 런던으로 몰려들었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국민투표 통과 1년을 넘었지만, 겉보기에 런던은 달라진 것이 없다.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이 넘쳐나고, 도시의 활력도 그대로다. 그러나 브렉시트 이후 런던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은 예전 같지 않다. 런던 곳곳에서 만난 런던 시민들에게선 낙관론과 우려가 교차하고 있었다.

런던 세인트 판크라스역이 작은 불이 나 폐쇄되자 출입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시민들. 런던이 다문화의 도시임이 확인된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런던 세인트 판크라스역이 작은 불이 나 폐쇄되자 출입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시민들. 런던이 다문화의 도시임이 확인된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유로스타 열차가 출발하는 세인트 판크라스역도 그 현장 중 하나였다. 1994년 도버해협 지하터널을 통해 런던과 파리ㆍ브뤼셀을 2시간 30분정도에 연결하는 노선이 개통되면서 섬나라 영국은 대륙이나 마찬가지가 됐다. 역에서 만난 영국인 호텔 컨설턴트 필립 몬스(54)는 "너무 많은 게 미정이라 브렉시트 이후를 예상하기 어렵다"면서도 "외국 젊은이들의 런던 유입이 줄면 활력이 떨어질테니 걱정이지만 정치권의 누구도 어리석은 협상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섞인 반응을 보였다.

 프랑스행 열차를 기다리며 동료들과 역내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던 크리스찬 이킴(26)은 “11년간 런던을 오가고 있지만 외국이라고 느껴본 적이 없다”며 “영국과 EU가 합의에 이르다보면 브렉시트로 엄청난 변화가 생기긴 어렵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프랑스에 사는 그는 “파리에 비해 잘 자리잡은 런던의 다문화 커뮤너티가 런던 금융산업에 큰 도움이 되는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영국이 큰 변화를 선택하진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EU 단일시장과 관세동맹에서 탈퇴하는 ‘하드 브렉시트'를 추진해온 테리사 메이 총리의 보수당이 지난 6월 총선에서 과반을 상실한 국내 정치 상황이 브렉시트로 인한 불안감을 다소 줄인 것으로 보였다.

 우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런던대 연합 학생회관에서 만난 영국인 조디 브래드쇼(18)는 "거리에서 수많은 문화가 반영된 의상을 보는 게 너무 좋고, 런던의 다문화는 아량의 가치를 배우는 기회이기도 했다"며 “하지만 이미 인종 차별이나 외국인 혐오를 공개적으로 말하는 이들이 생겨났다"고 안타까워했다.

런던대 연합 학생회관에서 만난 영국인 조디 브래드쇼(오른쪽)와 캐나다 출신 라일스 로빈슨. 이들은 모두 브렉시트의 악영향을 우려했다.

런던대 연합 학생회관에서 만난 영국인 조디 브래드쇼(오른쪽)와 캐나다 출신 라일스 로빈슨. 이들은 모두 브렉시트의 악영향을 우려했다.

해외 출신 젊은이들은 영국 내 취업난을 걱정했다. 6개월간 영국 비즈니스 스쿨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한 뒤 프랑스로 돌아가기 위해 판크라스역을 찾은 줄리 모린(21)은 “브렉시트 이후 영국은 EU 이민자들을 환영하지 않을 것이고 자유롭게 입국할 수 없는 국경이 생길 것”이라며 “근로자의 법적 권리도 보장되지 않을테니 영국에서의 취업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영국 정부는 회사 보증 취업비자(일반 유형)를 발급하는 연봉 기준을 2015년 2만800파운드에서 현재 3만파운드로 조정하는 등 계속 올리고 있다. 외국인의 유입에 장벽을 치려는 조치라는 반응이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나왔다. 워킹홀리데이로 런던 물류회사에 다니던 윤모(32)씨는 “정식 취업비자를 받을 예정이었는데 연봉 기준을 갑자기 인상하는 바람에 일을 그만두게 됐다”고 하소연했다. 런던에서 디자인 석사과정에 다니는 이세인(28)씨는 “졸업 후 미래가 너무 불안해 다른 유럽에서 일자리를 알아볼까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브렉시트는 물가 상승도 촉발하고 있다. 런던대 학생회관에서 만난 캐나다 출신 라일스 로빈슨(18)은 “안그래도 물가가 비쌌는데 지난 1년간 식비가 월등히 많이 들었다"며 “영국의 젊은층이 미래에 브렉시트로 인한 부담을 떠안게 될 것"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탈 런던을 고려하는 이들도 생겨나고 있다.
 컨설팅업체 메킨지가 지난달 영국 250개 상장사의 EU 출신 대졸 이상 학력자를 상대로 조사한 결과 56%가 브렉시트 협상이 끝나기 전 영국을 떠날 가능성이 크다고 답했다. 의료ㆍ기술ㆍ미디어ㆍ금융 등 숙련된 인력이 근무하는 분야에서 이같은 반응이 높게 나와 인력 유출 우려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폴란드 출신으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탄소배출권 트레이더 마르신 사이아자는 런던에 있는 지인들이 구직 요청을 많이 해오자 웹사이트를 만들었는데, 지난 5월 구직자가 2000명이 넘어서면서 아예 전문 알선업에 나섰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보도했다. 영국 통계청에 따르면 EU 주요 14개 회원국에서 온 110만 명 가운데 40%가 숙련 노동자인 반면 영국인은 28%에 그쳐, 브렉시트 이후 영국이 전문 인력 공백에 처할 것이란 관측을 뒷받침했다.

프랑스 출신으로 런던의 유럽투자은행에서 일하는 에므릭 드 벨. 그는 영국 정부의 입장이 매번 달라져 테리사 메이 총리가 EU 시민들의 영국 거주 권리를 보장하다는 발표를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프랑스 출신으로 런던의 유럽투자은행에서 일하는 에므릭 드 벨. 그는 영국 정부의 입장이 매번 달라져 테리사 메이 총리가 EU 시민들의 영국 거주 권리를 보장하다는 발표를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금융가인 뱅크역 인근 유럽투자은행 건물에서 만난 프랑스 출신 에므릭 드 벨(32)은 “프랑스 회사는 서열을 중시하는데 비해 런던은 능력에 따라 대우하는 문화가 있어 8년째 일하고 있다"며 “아직은 브렉시트의 불확실성이 커 고려하지 않지만 여기에 머물기 어려운 협상이 나오면 프랑스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메이 총리가 5년 이상 거주 EU 시민권자에게 영국인과 같은 권리를 부여하는 ‘정착 지위’를 제공하겠다고 발표한 데 대해서도 그는 “말이 매일 바뀌니 전혀 믿을 수 없다. 협상 만료 전날 밤이나 돼야 실체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불만을 드러냈다. 벨은 “브렉시트로 인해 런던의 경기가 악화되면 정치인들은 외국인들 때문이라고 선동할 것"이라며 “내가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런던은 실용주의가 지배하는 곳이었지만 결국 파리와 프랑크푸르트, 룩셈부르크 등에 지위를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출신으로 이 곳 은행에서 근무하는 앙트완 두카델(35)도 “다수는 아니지만 주변에 유럽으로 돌아가겠다는 이들이 늘고 있고 나도 검토 중"이라며 “7년간 런던에 살았고 가족과 터전을 닦았지만 불확실성이 너무 큰 상황이 몹시 불편하다"고 토로했다.

런던 뱅크역 인근에서 만난 프랑스 출신 앙트완 두카텔. 그는 주변에서 유럽 대륙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늘고 있고 자신도 가족과 함께 이주를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런던 뱅크역 인근에서 만난 프랑스 출신 앙트완 두카텔. 그는 주변에서 유럽 대륙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늘고 있고 자신도 가족과 함께 이주를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옥스퍼드 서커스역 인근 공사장에서 만난 코소보 출신 페흐미(39)는 “불법체류를 했다가 시민권을 땄다"며 “이젠 떠날 이유가 없는데도 브렉시트 이후 특히 ‘언제 너의 나라로 돌아갈 거냐'고 대놓고 묻는 영국인들이 많아졌다"고 전했다.

 심경이 복잡하긴 영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30대 후반 은행원 조니 레이넌은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EU 출신들에겐 몹시 모욕적이었던 것 같다”며 “여자친구가 독일인인데 남아주길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브렉시트 협상 마감 시한은 2019년 3월. 앞으로 1년8개월간 영국과 EU의 협상에서 런던의 운명이 결정된다. 분명한 것 한가지는 런던 시민 대부분은 런던이 앞으로도 글로벌 수도로 남기를 바란다는 사실이다. 그럴수 있을까. 런던의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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