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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무의 나라 진면목, 우리가 해외에 알릴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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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1호 16면

지난 연말 부임한 안성수 국립현대무용단장의 첫 신작 ‘제전악-장미의 잔상’(7월 28~30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의 단초는 ‘봄의 제전’이었다. 1913년 스트라빈스키의 음악과 니진스키 안무로 초연돼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혁명적인 춤 말이다. 2009년 스트라빈스키 음악에 맞춰 대표작 ‘장미’를 만들었던 안성수는 ‘봄의 제전’을 국악기로 재해석해 흥겨운 굿판을 벌이고 싶었다.

국립현대무용단 ‘제전악-장미의 잔상’ 만드는 안성수·최수진·라예송

그런데 작곡가 라예송은 안성수에게 포커스를 맞췄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봄의 제전’이 아니라, 안성수의 춤 ‘장미’에서 얻은 영감으로 전혀 새로운 곡을 쓰기 시작한 것. 전위적인 한국음악 신곡과 한국적인 현대무용 신작이 동시에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최수진·성창용·이주희 등 최고의 춤꾼이 한데 어우러지고 현란한 리듬의 오고무와 라이브 악사 5명이 함께 조명받는 이 굿판을 두고 안 단장은 “찬란했던 과거로 돌아가 미래를 축복하는 시간여행”이라고 했다. 안무가 안성수·작곡가 라예송·무용수 최수진과 함께 그 ‘시간여행’을 먼저 다녀왔다.


안성수

안성수

최수진

최수진

라예송

라예송

빠르다. 분명 국악기 소리지만 몹시 도전적으로 들리는 음악, 거기 맞춰 ‘댄싱9’의 스타 최수진 등 무용수 15명이 보여주는 변화무쌍한 움직임은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뽀얗게 분칠한 북 세트를 농락하는 요염하고 도발적인 오고무 춤사위도 기막히다. 14일 오픈 리허설을 함께 참관한 국립국악고·서울예고 학생 40여 명도 눈을 반짝이며 숨을 죽였다.

개막에 앞서 무려 5차례에 걸쳐 리허설을 공개한 안 감독은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났다”며 여유로운 미소다. 리허설 이전엔 무곡 콘서트도 열었다. 춤보다 먼저 음악을 소개하는 이벤트를 벌인 것이다. “음악이 굉장히 자랑스럽거든요. 무용을 만들며 음악도 만드는 기회가 상당히 드물죠. 라예송 선생님의 미니멀한 음악을 듣고 제 춤에 딱 맞는 춤곡이 나오겠단 걸 느꼈어요. 무용과 음악을 실짜기처럼 짠 건데, 무용 없이도 들을만한 음악이 나왔어요. 무용과 같이 들으면 스토리까지 보이겠죠.”(안)

평소 안성수의 팬이었다는 라예송 작곡가는 “단장님이기에 할 수 있는 작업”이라고 했고, 안 단장은 “처음 만들어온 2분짜리 곡부터 나를 잘 파악하고 있더라”며 놀라워했다. “국악고 시절부터 무용하는 친구들을 도와주곤 했지만, 전통무용엔 관심이 없고 계속 다른 걸 찾았어요. 마음에 드는 창작 무용을 찾다가 단장님 작품을 만났죠. 좋아하는 안무가가 갑자기 큰 작품을 맡겨주시니 떨리기도 했지만 꼭 잘하고 싶었습니다.”(라)

‘한국판 봄의 제전’을 기획했는데,
그런 혁명을 원한 건가요.
안: 그건 아니고 ‘봄의 제전’ 음악이 상당히 매력적이잖아요. 국악기로 재해석해보고 싶었는데, 라 선생님이 그건 아니라더군요. ‘한국판 봄의 제전’은 물건너 가고 ‘장미의 잔상’이 됐죠.(웃음)

라: 스트라빈스키를 재해석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장미’를 보면서 단장님 스타일을 어떻게 도와드릴까만 고민했죠. 제가 단장님 팬이 된 이유가 어떤 음악에 맞춰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동작을 보여주시기 때문인데요, 그 안에서 뭘 말씀하려는 걸까 들여다보니 바로 ‘여성성’이었어요.

안: 가장 위대한 존재가 여성이라 생각해서 제 작품은 늘 여성예찬인데, 그걸 들켜버린 거죠.(웃음) 이번엔 여성 전사의 춤이에요. 강인한 여성의 시대잖아요. 수진씨 별명을 ‘원더우먼’이라 붙였어요. 강인한 여성의 생명력을 보여주고 싶어서.  

직접 춰보니 과연 여성성이 느껴지던가요.
최: 저희는 보통 에너지나 몸의 질감을 사용해 몸을 크게 쓰는데 이 작품은 아주 섬세해요. 손 끝 하나, 시선 처리, 호흡 같은 디테일까지 챙겨야 하죠. 음악도 굉장히 미니멀해서 한 번 놓치면 뒤가 다 뭉개지구요. 큰 무대에서 에너지로 싸우던 몸이니 익숙하진 않죠. 하지만 그런 부분이 필요하단걸 느낄 나이가 된 것 같아요. 보여지는 춤을 내려놓는 법을 알았달까. 누가 보건 말건 예민하게 호흡하고 있어요.

안: 굉장히 답답할 거예요. 수진씨같은 ‘다 자란 사자’를 다시 고요하게 만들기가 힘든데, 점점 잘 하더군요.

오고무의 요염하고 도발적인 변신

이 작품은 단군신화까지 거슬러 올라가 고대의 춤을 상상하는 이야기다. 이슬람과 유대 문화가 결합된 스페인의 플라멩코에서 영감을 받아 우리 민족이 찬란한 문화예술을 꽃피웠던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 조상신도 만나고, 웅족과 호족이 전사게임도 한다. 오고무도 상고시대부터 전하는 춤이지만 흔히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파격을 보여준다. 무용수들이 전장에서 북을 치는 전사가 되는 것이다.

“오고무가 재밌는데 사실 좀 뻔하쟎아요. 새롭게 만들고 싶었는데 많이 바꾸면 안되니 살짝살짝 편집하고 리듬을 좀 바꿔 봤어요.”(안)

“제가 북가락 틀을 만들어드리고 그 안에서 단장님 해석으로 리듬을 빠르게 몰아갔죠. 북만 치지 말고 춤이 있으면 좋을 거 같아서 산조 가락을 일부러 넣고 동작을 넣어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북을 치는 척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죠.”(라)

아름다운 듀엣도 있다. 최수진과 성창용, 두 주역 무용수는 각각 ‘서동요’의 신라 공주와 백제 왕자다. 둘의 사랑으로 두 문화가 혼합되지만, 정작 클라이맥스는 계급 구분 없이 모두 ‘전사’가 되는 군무씬이다. “부족 시대에는 공주건 뭐건 다 전사였죠. 성골이고 진골이고 모든 계급이 나라를 위해 합심해 싸운건데, 그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이번에 국민이 또 우리를 살렸으니, 국민을 위한 축제를 열자는 거죠. 개인적으로 ‘장미’(2009)에서 시작해 ‘단’(2012), ‘혼합’(2016)으로 이어온 굿시리즈 마지막 작품이 될거예요.”(안)

“제 오리지널리티에 자신감 찾아준 작업”

우리 현대무용계를 대표하는 안성수와 최수진이 작품으로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러브콜을 먼저 보낸 건 최수진 쪽이다. “늘 도전하고픈 안무가였어요. 저나 창용 오빠는 좋은 재료인데, 우리를 갖고 어떤 작품을 만들어낼까 궁금했죠. 그래서 무조건 이번 신작을 해보고 싶어서 연락을 드렸어요.”(최)

‘댄싱9’이후 꾸준히 자기 작업을 해왔는데.
최: 우리나라에 좋은 무용수가 많은데 좋은 안무가를 만나면 해외에 내놔도 손색없는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사실 제 오리지널리티를 자신있게 보여주지 못했거든요. 현대무용수들은 그런 걸 좀 올드하다고 피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번에 뭐가 모던한 건지 느꼈어요. 이런 게 오히려 나를 제대로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인데 숨기고 있었더라고요. 이 작업이 제 오리지널리티에 자신감을 찾아준거죠.(최)  
발레와 한국무용이 결합된 안무가
혼란스럽지는 않나요.
최: 처음엔 너무 힘들었죠. 내가 뭘 잘하고 있는지 기준이 안 생기니까요. “춤을 발레·한국무용·현대무용으로 나눠 생각하지 않고 안무의 재료로만 생각한다”는 단장님 말씀이 도움이 됐죠. 3분법을 버리고 작품을 위한 움직임이라고만 생각하니 편해졌어요.

안: 현대무용수들이 제 동작을 힘들어해요. 발레의 ‘업 앤 업’을 하면서 밑에 큰 쇠구슬이 달린 느낌을 억지로 만들어 놓은 거니까. 몸에 배지 않으면 힘들고, 오히려 한국무용수들이 디테일한 동작을 쉽게 하는데, 이번에 혼합이 잘 된 것 같아요.

현재 국립현대무용단 시즌 단원은 한국무용 전공자와 현대무용 전공자가 뒤섞여 매일 발레와 한국무용 호흡을 트레이닝하고 있다. 현대무용수에게 ‘호흡’이 단시일에 가능한 건 아닐 터. 그런데 최수진에게는 ‘호흡’이 또렷이 보인다. “그래서 제가 ‘황진이’라고도 부릅니다. 수진씨가 한국무용의 호흡을 하는 걸 보면서 저도 수확이 커요.”(안)

여러모로 ‘3분법 타파’를 실천하는 무대지만, 각자 전공이 뚜렷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안 단장은 “최고의 전문가들이 만나야 융합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에서 융합이 안 되는 건 이도저도 아닌 사람들이 뭉치기 때문이에요. 여기 다들 모여 있지만 각자 스페셜리스트이기에 융합될 수 있죠. 특히 몸과 목소리로 하는 순수예술은 최고의 스페셜리스트가 되야 비로소 서로 어울릴 수 있어요.”(안)

국악 분야의 ‘최고 스페셜리스트’인 악사들도 또 다른 주역으로 어우러진다. 안성수 안무작 최초로 라이브 연주를 감행하는데, 악사들이 무용수들보다 높은 단 위에서 내내 조명을 받으며 구음까지 구사하는 건 “가무악일체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제가 믿는 건 우리나라는 가무의 나라란 거예요. 음악과 무용만큼은 우리가 가장 좋은 재질을 갖고 있고, 그걸 해외에도 보여주고 싶은 게 이번 공연의 목표입니다.”(안)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국립현대무용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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