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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순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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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정진우 기자 중앙일보 기자
정진우 경제부 기자

정진우 경제부 기자

납세 의무는 국민의 4대 의무 중 하나다. 헌법 제38조에는 “모든 국민은 법률에 정하는 바에 의하여 납세의 의무를 진다”고 적혀 있다. 납세가 국민의 의무라면 세금을 거두는 건 정부의 역할이다.

새 정부의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추진 중인 ‘부가가치세(VAT) 대리납부제’는 민간 기업인 신용카드사가 ‘세금 징수’를 맡는 구조다. 이 제도가 도입되면 현재 각 가맹점이 결제금액의 10%를 소비자로부터 거둬 3개월에 한 번씩 자진신고·납세하던 모든 과정을 카드사가 맡게 된다. 부가세가 ‘간접세’이기 때문에 가능한 정책이다.

정부가 주장하는 부가세 대납제의 명분은 체납·탈루 방지다. 체납과 탈루로 새어 나가는 부가세는 1년에 약 11조원으로 추정된다. 분기별로 돌아오는 납부기한 전 문을 닫은 가맹점이 소비자들로부터 거둬 놨던 부가세를 국세청에 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소비자는 물건 가격을 지불하면서 부가세를 냈지만 정작 세금은 국세청에 돌아가지 않고 가맹점이 가로채는 ‘배달사고’가 발생하는 셈이다.

현금 결제를 유도해 세원을 숨기는 방식으로 부가세를 내지 않는 경우도 많다. ‘현금 결제 시 10% 할인’이라는 문구 속엔 “현금 결제 시 소득신고를 하지 않아도 되니 부가세 10%는 받지 않고 깎아 주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부가세 대납제는 카드 결제와 동시에 카드사가 부가세를 거둔 뒤 국세청에 내는 시스템이다. 카드사는 일반 가맹점과 달리 쉽게 망하지 않고 금융 당국의 관리시스템에 들어와 있다. 이 때문에 세정 당국 입장에서는 가맹점이 아닌 카드사가 부가세를 걷어 납무하면 체납이나 탈루 없이 부가세를 100% 징수할 수 있다. 정부로서는 배달사고를 막을 수 있어 ‘손대지 않고 코 푸는 격’이다.

문제는 ‘체납·탈루 방지’라는 대의를 위해 사기업인 카드사의 희생을 강요할 수 있느냐는 대목이다. 돈을 유통시키는 데는 돈이 필요하다. 현재 가맹점이 분기별로 자진신고·납부하던 부가세를 카드사가 대리 납부하려면 전산 인프라와 프로그램을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 관련 인력 충원도 필요하다.

당국은 부가세 대납제 도입 목적을 설명하며 카드사를 설득 중이다. 부가세 탈루를 막겠다는 대의는 좋다. 하지만 좋은 명분에도 불구하고 한 집단의 일방적 희생을 전제로 해야 한다면 좋은 정책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만약 카드사가 압력에 밀려 대리 납부시스템을 자기 돈으로 구축했다면 곧바로 고객에게 주던 혜택을 줄일 것이다. 그러면 피해는 고객에게 전가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순 없다.

정진우 경제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