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기획] 대학 현장실습 10명 중 8명 한 푼도 못받았다...'열정페이'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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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취업박람회에서 취업 준비생이 프로그램 목록을 살펴보고 있다. 취업난이 계속되면서 대학생들의 취업 필수 '스펙'으로 기업 현장실습이 관심을 받고 있지만 실습비를 한 푼도 받지 못하는 '열정페이' 문제는 계속되고 있다. [중앙포토]

한 취업박람회에서 취업 준비생이 프로그램 목록을 살펴보고 있다. 취업난이 계속되면서 대학생들의 취업 필수 '스펙'으로 기업 현장실습이 관심을 받고 있지만 실습비를 한 푼도 받지 못하는 '열정페이' 문제는 계속되고 있다.[중앙포토]

 경기도의 한 전문대학에 다니는 한모(21)씨는 지난달부터 4주짜리 현장실습 자리를 구하려 인근 자동차 정비업체와 부품공장에 e메일을 보냈다. 이 대학은 현장실습이 졸업 필수 요건이라 이번 여름방학에 꼭 실습을 다녀와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4년제대 69%, 전문대 82%가 '무급 실습생' #'실습비 지급' 원칙이지만 교육부 '예외규정' 허용 탓 #실습생 "교통비 등 따지면 내 돈 내면서 일하는 셈" #대학들, 정부사업 따내려 실습 참여율 높이기에만 혈안 #기업들 "우리가 실습시키면서 돈까지 줄 마음은 없다" #전문가 "기업, 대학보다 학생 중심의 현장실습 제도 돼야"

 희망 급여와 희망 업무 등을 써서 보냈지만, 연락이 오는 업체가 한 곳도 없었다. 마음이 급해진 그는 ‘급여도 필요 없고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메일 내용을 바꿔 다시 보냈다. 그랬더니 마침내 한 업체와 연락이 닿아 이달 말부터 실습을 하기로 했다. 한씨는 “현장경험을 쌓는 건 좋지만 교통비 등을 생각하면 내 돈을 쓰면서 일하러 다니는 것이나 다름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학생이 기업에서 일하며 실무 경험을 쌓는 현장실습이 확산되고 있지만 일한 댓가를 전혀 받지 못하고 ‘열정페이’를 강요받는 사례가 여전히 줄지 않고 있다. 대학정보공시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4년제대와 전문대 359곳의 재학생 중 현장실습을 받은 14만8937명이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실습비를 한 푼도 받지 못한 학생은 무려 76%(11만3180명)에 달했다. 또 실습비를 못 받은 학생 비율은 4년제대(69.3%)보다 전문대(81.9%)가 특히 높았다.

지난해 6월 교육부가 대학에 보낸 공문. 법적으로 지급하는 것이 원칙인 실습비를 지급하지 않을 수 있는 예외 규정을 안내하고 있다. [자료 교육부]

지난해 6월 교육부가 대학에 보낸 공문. 법적으로 지급하는 것이 원칙인 실습비를 지급하지 않을 수 있는 예외 규정을 안내하고 있다. [자료 교육부]

 “실습지원비를 지급할 수 없는 사유가 있고, 학생이 사전에 동의했다면 예외로 인정한다”는 내용을 담은 공문을 각 대학에 보낸 것이다. 올해 6월 1일에 각 대학에 보낸 ‘현장실습 매뉴얼’에도 “학생 현장실습 결과물의 가치와 산업체 부담을 비교해 지급 여부를 결정하라”는 내용을 넣었다.

교육부가 이달 초 각 대학에 보낸 현장실습 매뉴얼의 일부분. 산업체 부담을 고려해 실습비 지급 여부를 결정하라고 안내하고 있다. [자료 교육부]

교육부가 이달 초 각 대학에 보낸 현장실습 매뉴얼의 일부분. 산업체 부담을 고려해 실습비 지급 여부를 결정하라고 안내하고 있다. [자료 교육부]

 충남의 한 대학에 재학 중인 박모(23)씨는 지난해 여름방학에 중소기업에서 4주간 현장실습을 했다. 대학 내 현장실습지원센터에서 소개해준 회사였지만,  ‘단기간 교육 목적으로 이뤄지는 실습이므로 현장실습지원비를 받지 않는다’는 동의서에 서명을 해야 했다. 박 씨는 4주간 전산 자료 입력이나 행사 물품 나르기, 사무실 정돈 같은 단순업무를 주로 했다. 그는 “취업때 이력서에 현장 경험을 한 줄 적으려고 실습을 했지만 댓가 없는 착취를 당한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한 대학이 마련해놓은 실습지원비 미지급 동의서 양식. 학생들은 돈을 받지 않겠다는 내용의 이 동의서에 서명해야만  현장실습을 받을 수 있다.

한 대학이 마련해놓은 실습지원비 미지급 동의서 양식. 학생들은돈을 받지 않겠다는 내용의 이 동의서에 서명해야만 현장실습을 받을 수 있다.

 대학들이 이처럼 ‘무임금’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현장실습을 독려하는 이유는 참여율 수치가 정부가 실시하는 각종 재정지원 사업의 주요 지표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교육부가 올해 3270억을 투자하는 ‘사회맞춤형 산학협력 선도대학’(LINC+) 사업의 경우 평가에서 가장 높은 점수가 걸린 지표 중 하나가 ‘현장실습 참여율’이다. 이때문에 일부 대학은 현장실습을 아예 졸업 필수 요건으로 정해 참여율을 높이기도 한다.

 서울의 한 사립대 관계자는 “재학생 중에서 몇 퍼센트가 현장실습을 갔는지만 평가하기 때문에 대학으로선 일단 숫자를 늘리는게 중요하다”며 “실습을 보낼 기업 눈치도 봐야하기 때문에 실습비를 요구하긴 어렵다”고 털어놨다.

 기업들도 실습비 지급에는 난색을 표하고 있다. 경기도 안산의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학생이 오면 도움은 되지만 돈을 주면서까지 쓰고 싶지는 않은 기업이 대부분일 것”이라며 “대학이 못한 교육을 대신 해주는 건데 돈까지 주기는 어렵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처럼 '열정페이'강요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도 교육부는 실습비 지급을 강제하기는 어렵다는 반응이다. 최승복 교육부 취창업교육지원과장은 “기업의 실습 프로그램이 교육에 초점을 맞추고있는데 돈까지 달라고 강요하기는 어렵다”며 “실습 프로그램 성격에 따라 대학과 기업이 협의하는게 맞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장실습의 부작용이 있다는 점은 동의한다. 대학에도 과도한 참여율 높이기는 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학생을 우선 고려하는 정책이 되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우승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부총장은 “대학과 기업 의견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육부가 나서서 ‘무급 현장실습’을 용인하는 행위는 개선돼야 한다”며 “열정페이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만큼 정부가 실습비 지원 현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학생을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남윤서 기자 nam.yoonseo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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