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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단결돼 있으면 사드 보복도 비용 청구도 불가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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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호 22면

[세상을 바꾼 전략] 협상의 기술

1 1953~54년 남한에서 석방된 중공군 출신 반공 포로들이 대만행 항공기를 탑승하기 전에 서울에서 환송받고 있다.

1 1953~54년 남한에서 석방된 중공군 출신 반공 포로들이 대만행 항공기를 탑승하기 전에 서울에서 환송받고 있다.

2 197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카터 미국 대통령과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이 SALT II에 서명하고 있다. 이 협정은 양국의 국내 비준을 받지 못했다. [위키피디아]

2 197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카터 미국 대통령과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이 SALT II에 서명하고 있다. 이 협정은 양국의 국내 비준을 받지 못했다. [위키피디아]

가역(可逆·reversible) 또는 불가역(不可逆·irreversible)이라는, 그렇게 익숙하지는 않은 단어가 가끔 등장하고 있다. 이 단어들은 물질이 원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뜻하는 과학 용어, 또는 상황을 되돌리거나 되돌릴 수 없게 만드는 협상전략 용어였다. 21세기에 들어와서, 북한 핵 문제 합의를 두고 미국 정부가, 또 종군 위안부 문제 합의를 두고 한국·일본 정부가 이런 표현을 사용하면서 가역과 불가역은 일반 용어가 됐다. 그러다가 최근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문제의 한·일 간 합의와,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한반도 배치의 한·미 간 합의를 어떻게 계승할 것이냐를 두고 좀 더 흔해진 단어가 되고 있다. 가역과 불가역의 전략적 효과를 숙지해야 할 상황이 됐다. 그래서 오늘의 역사에 등장하는 두 가지 사건으로 그 효과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은 불가역적 #SALT II 협정은 미 의회가 비준 거부 #사드·위안부 협상 놓고 가역성 논란 #국민의 뜻이 가장 강력한 압박 수단

먼저, 지금으로부터 꼭 64년 전인 1953년 6월 18일 새벽 0시에 발생한 불가역적 사건이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8개 포로수용소의 반공 포로를 전격 석방했다. 포로수용소에 근무 중인 소수의 유엔군을 제압하거나 전력 공급을 끊어 수용소 문을 개방했는데, 남·북한 출신 반공 포로 3만5698명 가운데 2만7389명이 탈출했다. 61명은 탈출 과정 중에 사망했고, 나머지 8248명은 탈출하지 못했다. 친(親)공산 포로가 많은 거제도 수용소에서는 석방을 아예 시도하지 않았다.

1951년 7월에 시작해서 만 2년을 끌었던 6.25전쟁 휴전 회담에서 합의의 큰 장애물 하나는 포로 문제였다. 양측이 주장하는 포로 수가 많이 달랐고, 또 공산군 측에 잡혔지만 실종 처리된 포로의 문제가 있었다. 포로 송환에 대해서는 첨예한 대립이 있었다. 공산군 측으로 송환되기를 거부하는 반공 포로들은 개인 의사에 따라 송환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유엔군 측 애초의 입장이었고, 공산군측의 입장은 포로 전부를 강제적으로 송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1953년 6월 8일 판문점에서 유엔군과 공산군은 합의에 이르렀다. 양측은 본국 송환에 반대하는 포로를 중립국관리위원회의 감독 하에 일단 두고 귀환을 설득해 보기로 했다. 남한 정부는 공산 진영과 가까운 국가로 여겨지던 인도 등 이른바 중립국에서 포로 송환을 관리하는 방식에 반대했고, 결국 유엔군·공산군 합의를 뒤집고 포로 석방을 단행했다.

일방적 포로 석방은 남한에게도 시련을 가져다주었다. 북측이 남측 포로를 억류하는 빈도와 정도는 7월 정전협정 전후에 더 많아졌다. 또 6~7월에 거쳐 중공군과 북한군은 국군이 방어하고 있던 이른바 금성 돌출부를 대규모로 공격했다. 일방적인 포로 석방 후 미군은 국군 방어에 소극적으로 협력했고 결과적으로 남측은 북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지역을 잃게 되었다. 7월 11일 이승만 정부는 휴전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이승만의 완고한 태도로 교착된 휴전 협상을 타결하기 위해 미국 정부는 이승만을 제거하는 이른바 에버레디 계획을 검토한 바 있다. 미국 대통령 보좌관 셔먼 애덤스에 따르면,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을 제거할 수 있는지 검토했으나 이승만 정권의 국내 지지 기반을 확인한 후 에버레디 계획을 포기했다. 포로 석방 후 이승만의 국내 인기는 치솟았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포로들이 본국에 송환된 후 겪은 비인권적 탄압이 알려지던 차였기 때문에 이승만의 포로 석방은 국제 여론에도 부합했다. 미국은 수많은 인명 피해를 입은 후 미군을 철수해서 한반도를 공산권 수중에 둘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이승만이 요구한 한·미 동맹을 결국 받아들였다.

이승만의 포로 석방은 엎지른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불가역성을 십분 활용한 한 수였다. 당시 반공 포로들의 수용소는 대체로 인구밀집 지역에 있었고 따라서 달아난 포로를 다시 잡아가두기는 매우 어려웠다. 이런 불가역성은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 참전국들 그리고 북한·중국 등에게 남한이 단독으로도 휴전을 깰 수 있음을 상기시켜 남한을 배제하는 휴전 합의라는 결과를 포기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국내외 사정으로 전쟁을 무조건 끝내려 하던 미국 정부가 남한의 휴전 동의를 얻으려 방위조약과 경제원조 등을 제공하게 만들었다. 포로 석방은 적어도 남한이 북한 김일성 정권하에 들어가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탁월한 한 수였다. 그 이면에는 불가역이라는 속성이 존재했기 때문에 작동했다.

그렇다고 이승만이 미국 이익을 배제하고 남한만의 이익을 추구한 것은 아니다. 이는 1953년 11월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한 미국 부통령 리처드 닉슨의 출장 보고서 및 회고록에서 확인된다. 닉슨 회고록이 전하는 이승만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미국이 이승만을 통제한다고 공산주의자들이 확신하는 순간 당신네는 가장 효과적인 협상 포인트 하나를 이미 잃은 게 되고 우리도 모든 희망을 잃은 게 된다. 내가 도발적 행동을 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지속적인 견제가 된다. … 미국은 평화를 몹시도 원하기 때문에 뭐든 평화적이면 할 것이라고 공산주의자들은 생각한다. … 그러나 내가 있는 한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 내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답신을 보내겠다. 내 편지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직접 펴 읽어 본 후 없애 버렸으면 한다. … 수많은 신문 기사들은 이승만이 일방적으로 행동하지 않기로 약속했다고 보도한다. 그런 인상은 우리 선전과 맞지 않다. … 한국의 일방적 행동에 관한 내 발언 모두가 미국을 도와주기 위함이었다. 한국은 그렇게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게 가능하지 않음을 마음속으로 알고 있다.”

닉슨은 귀국 후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 이승만의 공개적 행동과 속내를 구분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닉슨은 회고록에서 이승만의 전략을 높게 평가한 바 있다. “나는 한국인들의 용기와 인내, 그리고 이승만의 강인함과 총명함에 감명을 받고 한국을 떠났다. 공산주의자를 다룰 때 스스로를 예측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 이승만의 식견을 많이 되새겨 보았다. 나는 훗날 세계를 많이 돌아다닐수록 또 많이 배울수록 이 노인이 매우 지혜로웠음을 더욱 인정하게 되었다.”

이제 가역성에 해당하는 오늘의 역사를 살펴보자. 지금으로부터 꼭 38년 전인 1979년 6월 18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은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II에 서명했다. 미국은 소련이 군비경쟁에서 앞서 나갈까 우려하고, 소련은 미국-중국 관계 개선을 우려하던 차에 이뤄진 합의였다.

카터, 아프간 침공 이유로 비준 요청 철회 

SALT II 체결 후 미국 국내 반응은 좋지 않았다. 온건파는 실제적인 군축을 담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고, 강경파는 소련을 견제할 무기 개발이 제한 받는다고 비판했다. 9월에는 소련 군대가 쿠바 미사일 위기 직후 쿠바에서 철수하지 않고 계속 주둔해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2월 20일 미국 상원의 군사위원회는 찬성 10, 반대 0, 기권 7로 SALT II가 미국 안보에 이익 되지 않는다는 보고서를 채택했다. 12월 하순에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침공하여 하피줄라 아민 대통령을 살해하는 등 내정에 관여함으로써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1980년 1월 3일 카터 대통령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이유로 SALT II의 비준 요청을 철회했다. 물론 양국은 SALT II에서 정한 1985년 말까지 합의 내용을 대체로 준수했지만 의미 있는 합의 이행은 별로 없었다.

비준은 대외적 약속을 국내에서 뒤집을 수 있는 가역적 제도 가운데 하나다. 가역성은 자신에게 나쁜 협상 결과를 무효로 만들 수 있게 하고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나은 협상 결과를 상대가 동의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미국은 외국과의 합의가 자국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하면 상원 비준 절차에서 그 합의를 무효화시킨다.

가역성이 불리한 합의를 깨게 하는 것이라면, 불가역성은 유리한 결과에 대못을 박아 바뀌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가역이든 불가역이든 내부는 행동이 엇갈려도 지향하는 가치가 같아야 성공한다. 64년 전 이승만 대통령은 부산정치파동 등 정치적 어려움을 겪던 시절이었고, 38년 전 카터 대통령 역시 당내 경선에서 도전 받을 정도로 인기가 없고 결국 재선이 힘든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두 상황 모두 적전(敵前)분열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익에 맞는 결과를 얻었다. 뒤집어 말하자면 국민 다수의 뜻을 중시했다는 말이다.

경쟁 집단을 국외 세력보다 미워하면 망해 

목하 한국의 대외관계에서는 여러 위기와 압력이 전개되고 있다. 이런 상황일수록 협상에 따라 결과가 좌우된다. 국내 절차를 강조하는 것은 주요한 대외 협상 전략이다. 국회 비준과 같은 국내 절차를 국익에 맞게 활용하려면 국민 다수의 이익을 따라야 한다. 국민의 뜻이 대외 관계에서 제일 강력한 압박 수단이기 때문이다. 정파이념적 지향을 목적으로 국내 절차를 운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국민 다수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특정 계층만의 선호에 맞는 정책은 사실 오래 가지도 못한다. 만일 국민 다수가 수용하지 못하지만 정말 국익에 필요한 정책 방향이라면 엘리트 다수라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2015년 말 일본과의 위안부 문제를 불가역으로 표현하면서 합의한 것은 전략적이지 못한 대처였다. 그렇지만 이제는 백지 상태에서 다시 가역이냐 불가역이냐를 선택하는 상황이 아니라, 이미 불가역으로 규정된 합의를 가역으로 만들 수 있는지 따져 봐야 하는 상황이다. 일본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죽으면 그것이야말로 불가역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국민이 하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느냐가 가역의 관건이다.

사실 사드 배치 문제도 국민이 단결되어 있으면 중국의 사드 보복이든 미국의 사드 비용 청구든 가능하지 않다. 국내의 경쟁 집단을 국외 세력보다 더 미워하면 그 체제는 종식될 가능성이 크다. 먼 곳으로 갈 것 없이 고구려나 조선의 멸망만 봐도 그렇다.

대외 정책의 방향이 달라도 목적이 같다면, 강경한 내부 이견이 대외 협상에서 오히려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대외 문제엔 궁극적으로 하나가 되어 가역과 불가역의 양날을 잘 활용하는 대한민국 외교를 기대해본다.

김재한 :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로체스터대 정 치학 박사. 2009년 미국 후버 내셔널 펠로. 2010년 교육부 국가석학으로 선정됐다. 정치 현상의 수리 적 분석에 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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