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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텀블러 폭탄’에 놀란 대학…"이 참에 갑을관계 바로잡자" 목소리

중앙일보

입력

#서울대 공대 대학원에 다니는 A씨는 "교수 이름으로 받은 국가·기업체 연구과제를 실제로 진행하는 건 대학원생들인데, 기여도에 맞는 인건비를 받는 일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많은 연구실에서 인건비 명목으로 받은 돈을 '방비 통장'에 모아뒀다 지도교수가 원하는 다른 용도로 쓴다는 것이다. A씨는 조심스럽게 "교수가 연구실 옆에 부설 연구소를 차리고, 그 주소로 페이퍼 컴퍼니를 만든 다음 가족들 이름을 직원처럼 올려 연구비를 빼돌린다는 소문도 들었다"고 했다.

#서울의 유명 사립대 공대 대학원을 졸업한 B씨는 아직도 모교에 지도교수를 만나러 갈 때면 식은땀이 나고 얼굴이 노래진다. 대학원 시절 교수에게 욕을 먹는 것은 일상이었다. "유전자부터 잘못된 애"라는 말 정도는 예사고, 다짜고짜 교수실로 불러 한참 욕을 하더니 "스트레스받는데 욕할 데가 없어 불렀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B씨는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까지 예상보다 2년이 더 걸렸다. 교수는 매 학기 이런저런 핑계로 졸업을 막았다. "교수 앞에서 졸업에 대해 말을 꺼내는 건 '죄'였다"며 "새로운 학생을 받아 일을 가르치기가 귀찮아서 '숙련공'을 계속 잡아두려는 것"이라 했다. 아직 졸업을 못 한 옛 동료 연구원들은 여전히 똑같은 '갑질'을 당하고 있다.

"불이익받을까 두려워 갑질 당해도 참는다"

연세대 대학원생 김모(25)씨가 만들어 지도교수를 다치게 한 '텀블러 폭탄'[독자제공=연합뉴스]

연세대 대학원생 김모(25)씨가 만들어 지도교수를 다치게 한 '텀블러 폭탄'[독자제공=연합뉴스]

지난 13일 연세대에서 대학원생이 사제폭발물을 만들어 지도교수를 다치게 한 사건에 대학가가 술렁였다. 사제지간의 갈등이 비뚤어진 범죄로 표출된 이번 사건을 계기로, 대학원 내 고질적인 '갑을관계'를 바로잡아 보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대학 게시판에는 대학원생들의 폭로가 이어졌다. 연세대 커뮤니티 '세연넷'에는 ▲교수가 수업하기 귀찮다고 대학원생에게 강의를 맡겼다 ▲교회 목사인 교수가 대학원생들에게 주일마다 자기 교회에서 예배드리라고 강요하다가 학생들이 그만뒀다 ▲말끝마다 '노예XX들아'를 붙이는 교수가 있다 등 각종 '연구실 괴담'이 줄을 이었다. 서울대 커뮤니티 '스누라이프'에는 "석사만 받고 연구실에서 탈출한 졸업생"이라며 국민권익위원회와 국민신문고에 "서울대 공대 모든 연구실에 대한 전수조사를 촉구하는 내용으로 신고했다"는 글이 게시됐다. 이번 일을 계기로 갑질 피해 사례를 공유하고 서로 응원하는 모임을 만들자는 게시물도 올라왔다.

서울대 인권센터가 13일 발표한 '2016 서울대 대학원생 인권실태'에 따르면 서울대 대학원생 가운데 33.8%가 폭언 및 욕설을 들었다고 응답했다. 기합·구타(3.9%), 논문이나 추천 등의 대가 제공 요청(4.8%), 교수의 개인 업무 수행 지시(14.7) 등 불합리한 요구를 받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서강대 대학원 총학생회는 15일 부당한 처우를 경험한 학생 중 54%가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서 참고 넘어갔다'는 내용의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텀블러 폭탄'에 놀란 이웃 학교, 자성의 목소리

15일 이화여대 김혜숙 총장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교수와 제자의 갈등을 조율해주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사진 이화여대]

15일 이화여대 김혜숙 총장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교수와 제자의 갈등을 조율해주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사진 이화여대]

이웃한 대학들은 자성과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이화여대 김혜숙 총장은 15일 기자간담회에서 "박사학위를 따기까지 상당히 긴 기간동안 관계가 이어지고, 여기서 갑을관계나 권력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제3자가 상담을 하고 교정을 해줄 수 있는 제도가 우리 대학에 전무하다"고 지적했다. 김 총장은 또 "평등한 관계, 객관적인 평가 시스템이 형성되지 않으면 우수한 인재가 우리나라 대학에 오는 것을 기피하는 현상도 생길 것 같다"며 "이제는 학생의 인권, 교수의 교권을 고려해 다양한 방식으로 논의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강대는 같은 날 학교측과 대학원 총학생회가 공동으로‘대학원생 권리장전’선포식을 가졌다. 서강대 대학원 총학생회는 권리장전을 통해“대학원생은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며 "대학원생들은 연구자로서, 인간으로서 자기 존엄성을 훼손당하면 안 된다”고 주장헸디. 박종구 서강대 총장도 행사에 참석해 권리장전에 서명했다.

이현 기자 lee.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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