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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시집 『가끔은…』진형준<문학평론가>|연륜뛰어넘은 「자유로움」가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나는 언젠가 오규원에 관해 쓴 한편의 글 끝에 『중요한 것은 시인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순환의 고리가 부여하는 긴장을 견디는 일이다』고 쓴후 『시인이여, 시인의 이름으로 그 고통을 감수하시라』고 감히 적어 넣었었다. 감히 적어넣은 이유는 그가 그 「긴장견디기」를 통한 자기생성의 자리에 언제고 머물러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아니,「생성의 자리에 끊임없이 머물기」라기보다는 「끊임없는 생성으로 변모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그의 새로운 시집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를 읽고 나서 나는 그때의 덧붙임이 얼마나 주제넘었던가를 알게되었다.
그 덧붙임은 그가 초기시들로부터 최근의 시들사이까지 얼마나 싱싱한 젊음을 견지해 왔는지를 내가 미처 보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의 새 시집을 읽어 보라. 그는 얼마나 젊은가. 이미 40대 중반에 접어든, 시 쓰기가 20년이 넘는 그는 여전히 젊다.
그러나 이 말을 그의 초기시에서 보이던 젊음의 모습을 그가 20여년 동안 변함 없이 간직하고있다는 뜻으로 읽으면 안된다. 변함없이라니! 아마 오규원이 들으면 가장 질색할 말이 이 「변함없이」라는 말이리라.
그가 젊다는 것은 나이가 주는 「연륜의 무게」조차 거부할 정도로 그의 정신이 자유롭고 싱싱하다는 뜻이다. 그때의 「자유로움」과 「싱싱함」은 주체할길 없는 욕망 때문에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젊음의 자유로움이 아니라 그 자유로움을 위해 온통 마음을 비워두는 자유로움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우리의 마음은 그 무엇으론가 채워질 준비가 항상 되어 있다는 것을. 그러니 「마음을 비우는 자유로움」을 위한 싸움은 정말로 힘든 싸움이다.
그런 그에게 『요즘 어떠세요』라고 안부를 물으니 『뭐 여전하지』 라고 대답한다. 내게는 그 대답이 『여전히 싸우고 있지, 뭐』하는 소리로 들린다.「관념해체」라는 그의 시들에 항상 따라다니는 상표까지도, 심지어 『오규원은 시인이다』는 너무나 당연한 명제까지도 그의 싸움의 대상에서 제의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내게는 든다.
그렇다면 그의 젊음과 함께 사용했던 「싱싱함」이란 단어는 수정되어야한다. 이렇게 말해져야한다. 그의 「싱싱함」은 『내장의 고름』을『마음놓고 누렇게』 뱉어내는, 『아름다운 것은 결국 상처가 날수 있는 나와 너의 살아있는 육체구나』 하는 깨달음, 그러나 그 깨달음 때문에 매번 부정될 수밖에 없는 「성숙한 깨달음」이라는 뜻과 다름 아니다.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는 시집제목에서 우리는 「주목받고 싶다」는 단순한 치기보다는 「가끔은」이라는 부사로 감싸인 성숙함을 읽어야한다. 그러나 그 성숙함은 오히려 그를 불편하게 한다.
그런 시인에게『선생님, 이젠 좀 편해지셔도 되지 않겠습니까』고 묻고 싶어진다. 그러나 묻지 않았다. 만일 질문을 던졌다면 아마도 그는『아니, 나처럼 편한 사람이 어디있어』라고 반문하면서 분명 그에게도 있을 싸움을 중지하고싶은 휴식에의 욕망을 스스로 경계했으리라. 그럴까? 그냥 빙그레 웃어넘겼을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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