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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 리포트] 중기 기술금융, 가계 중금리 대출 늘려야 ‘돈맥경화’ 풀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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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한국은행의 완화적 통화정책으로 기준금리가 지난해 6월부터 사상 최저인 1.25%를 기록 중이다. 이에 따라 통화증가율이 명목 경제성장률보다 크게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일부 중소기업과 가계는 자금조달의 애로를 호소하고 있어 이들에게는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말이 실감 날 것이다.

저금리 정책으로 유동성 늘었는데 #금융권, 부실 줄이려 대출 깐깐하게 #담보 없는 중기는 자금조달 어려워 #군불 온기 경제 전반에 퍼지게 해야

완화적 통화정책으로 전체적으로 유동성이 풍부해졌지만, 부분적으로는 자금이 부족한 상황을 흔히 ‘돈맥경화’라고 지칭한다. 몸속에서 피가 잘 돌지 않으면 ‘동맥경화’라고 하듯이, 경제의 혈액인 돈이 시장에서 제대로 돌지 않는다는 것을 빗댄 말이다.

그렇다면 돈맥경화의 근거는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전반적인 시중 유동성 사정이 괜찮은지 살펴봐야 한다. 시중에 유동성이 부족하거나 금융 상황이 긴축적일 경우 대다수 경제 주체들이 자금 사정에 애로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유동성의 대표지표인 통화증가율(M2)은 경제성장률을 상회하는 중이다. 금융여건의 완화·긴축 여부를 살펴보는 금융상황지수도 완화적 상황을 이어가고 있다. 즉 최근의 자금조달 애로 호소를 시중 유동성 부족이나 긴축적인 금융 상황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돈맥경화, 즉 ‘시중에 돈이 잘 돌지 않는다’는 주장의 근거는 무엇일까. 가장 많이 거론되는 근거는 통화유통속도와 요구불예금회전율 하락이다. 하지만 이 지표들의 산출 과정을 살펴보면 외견상 명칭과는 달리 시중에 돈이 잘 도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기에는 한계가 있다.

자료:한국은행

자료:한국은행

통화 유통속도는 명목 국내총생산(GDP)를 통화량으로 나눠 산출한다. 시중에 돈이 얼마나 잘 ‘유통’되고 있는지보다는 실물경제 활동에 비해 통화량이 얼마만큼 ‘존재’하는지를 나타낸다. 요구불예금회전율은 예금인출액을 예금잔액으로 나눠 구한다. 시중 자금이 활발하게 ‘회전’하는지보다는 계좌에서 예금이 얼마나 ‘인출’됐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유통과 존재의 정도, 회전과 인출의 정도는 상관관계가 높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 지표의 하락이 시중에 돈이 잘 돌지 않는다는 주장의 논거가 된 것은 유통과 회전이라는 명칭에서 비롯된 선입견 때문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들 지표가 하락한 배경을 살펴보면 돈이 잘 돌지 않는 것과는 관계가 적다는 점이 잘 드러난다. 통화유통속도의 경우 시중자금이 활발하게 유통되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통화량이 GDP보다 더 빠르게 증가할 경우에도 하락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경기회복 지원을 위한 기준금리 인하로 대출금리가 하락하고 대출규모와시중 유동성이 확대되었다. 반면 경기회복은 더딤에 따라 ‘명목 GDP/M2’로 계산되는 통화유통속도는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자료:한국은행

자료:한국은행

요구불예금회전율 하락도 예금금리 하락으로 정기예금 가입 유인이 낮아지면서 분모인 요구불예금 잔액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통화 유통속도나 요구불예금 회전율의 하락은 ‘돈이 제대로 돌지 않는 것’을 나타내기보다는 ‘시중 유동성이 많아진 결과’로 봐야 한다. 오히려 시중에 돈이 많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수 있다.

미국에서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통화유통속도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이는 미 연방준비제도(Fed)가 제로금리와 양적완화라는 비전통적 통화정책을 쓰면서까지 금융시장에 대규모 유동성을 공급한 결과다. 이에 따라 경기회복 속도에 비해 시중 유동성이 단기간에 크게 늘어나면서 통화유통속도가 하락했다.

자료:한국은행

자료:한국은행

따라서 통화유통속도나 예금회전율 하락을 자금조달 애로의 근거로 삼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지표의 하락은 완화적 통화정책으로 늘어난 시중 유동성 규모에 비해 경기회복이 더디게 진행되면서 나타난 결과이기 때문이다. 시중 유동성이 풍부한 데도 실물경제 회복속도가 늦어졌기 때문이지 시중에 돈이 잘 돌지 않아서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개인이나 기업에게는 ‘시중에 돈이 잘 돌지 않는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는 시중 유동성이 급격히 늘어난 이후에도 금융시장에서 신용경계감 확대로 대출태도가 한층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신용위험에 대한 차별적 태도가 강화되는 것은 실물경제가 부진하면 신용위험이 더 커지면서 차별화 정도가 심화되기 때문이다.

자료:한국은행

자료:한국은행

실제로 금융회사들은 대출부실을 줄이기 위해 손실발생 가능성이 적은 주택담보대출이나 업황·재무상태가 좋은 우량기업 대출은 늘리고 기술력은 있지만 담보가 없는 중소기업이나 신용이 낮은 고객 등에 대해서는 대출태도를 강화하고 있다. 이처럼 특정 부문으로 돈이 흐르지 않고 신용차별화가 나타나는 것은 금융시장의 선별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징표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소위 돈맥경화 현상은 시중 유동성은 늘었지만 금융회사의 신용차별화로 일부 차주들은 대출을 받기 어려워진 상황을 지칭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만약 광범위하게 신용부족 현상이 나타난다면 유동성 확대 등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한편 미국에서도 서브프라임 모기지 투자가 금융위기의 요인이 되었던 만큼 유동성이 대규모로 확대 공급된 이후에도 신용도가 낮은 차주들은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렇지만 최근 들어 경기회복세가 지속됨에 따라 금리를 점진적으로 인상하고 보유채권 감소를 통한 시중 유동성 축소 계획을 밝히고 있다.

자료:한국은행

자료:한국은행

따라서 돈맥경화 문제는 풍부한 시중 유동성을 추가로 늘리기 보다는 이를 통한 통화정책의 파급효과 등으로 경기가 회복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경기가 회복되면서 대출부실화 가능성이 낮아지면 금융회사의 신용경계감이 완화되고 신용도가 낮은 차입자에게도 자금공급이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경기회복이 소득양극화, 고령화 등 구조적인 문제에도 상당 부분 좌우되고 있어 장기적 관점에서의 정책적 노력도 필요한 상황이다.

특정 계층에 대한 선별적 지원을 통해 넘치는 시중 유동성을 자금이 꼭 필요한 곳으로 흘러가도록 유도함으로써 시장 기능을 보완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기술금융이나 보증을 통해 담보가 부족하지만 성장성 있는 유망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공급을 늘릴 수 있다. 또한 중금리 대출시장을 활성화하여 신용도가 낮은 차입자들의 금융기관 접근성을 제고할 수 있을 것이다.

김인구한국은행 시장총괄팀장

김인구한국은행 시장총괄팀장

우리의 전통 난방법인 온돌은 아궁이에 불을 때어 따뜻한 기운을 만든 뒤 그 온기가 집안 전체에 퍼지게 했다. 지금은 완화적 통화정책을 통한 유동성 공급 확대로 경기회복의 군불을 충분히 땐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군불의 온기가 경제 전반에 퍼질 수 있도록 정책당국이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다. 한편 경제활동에 필요한 이상으로 군불을 때어 유동성이 지나치게 많이 공급되면 과잉 유동성으로 인한 금융불균형의 폐해가 나타날 수 있음에 유념해야 한다.

김인구 한국은행 시장총괄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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