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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로렌스와 세 명의 서구인 … 스릴 넘치는 중동 첩보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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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아라비아의 로렌스
스콧 앤더슨 지음
정태영 옮김, 글항아리
880쪽, 4만원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옥스퍼드대 출신의 고고학자로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 장교로 중동에 근무했던 T.E. 로렌스의 별명으로 유명하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오스만 튀르크에 대항해 봉기한 아랍인 반란군을 지휘하며 현지를 누볐다. 그는 오스만 군대는 물론 탐욕스러운 일부 아랍 지도자, 심지어 이곳을 전리품으로 여기는 본국의 식민주의자들과도 부딪혀가며 중동 평화와 독립을 위해 힘썼다. 그 결과 오늘날 중동 국경선의 상당 부분이 새롭게 그어졌다.

하지만, 미국의 분쟁전문 기자이자 소설가인 지은이는 이 책에서 로렌스는 물론 같은 시기, 동일한 공간에서 서로 다른 목적과 방식으로 활동했던 네 명의 서구인을 동시에 다뤘다. 고고학자 출신으로 이집트 카이로 주재 독일 대사관 외교관이던 쿠르트 프뤼퍼는 로렌스의 경쟁자를 넘어 대항마 역할을 했다. 영국을 비롯한 서구제국주의의 중동 지배에 대항하는 범아랍 지하드(성전)를 부추기는 비밀 임무를 맡았기 때문이다. 유대인 농학자인 아론 아론손은 열렬한 시온주의자였다. 오스만제국 시리아 총독의 신임을 얻은 그는 겉으로는 오스만을 위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이들에 대항하는 정보망을 은밀히 구축했다. 이는 나중에 이 지역에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 씨앗이 됐다. 이 시기 중동 유일의 미국인 스파이 윌리엄 예일은 석유회사 스탠더드오일의 부탁을 받고 유전을 찾기 위해 곳곳을 탐사했다.

이들은 영리함과 용기에 더해 남을 배신하고 이용하는 재주까지 적극적으로 활용해 당시 ‘지정학적인 무주공산’이던 이 지역에서 자신의 경력을 새롭게 쌓은 것은 물론 역사의 흐름까지도 바꿔놓았다. 당시 영국은 중동 지역을 전리품으로 여겼으며, 독일은 이 지역이 영국에 맞서는 반제국주의운동의 온상이 되기를 기대했다. 시온주의자들은 이 곳을 새로운 국가건설의 요람으로 생각했다. 미국은 장차 전략자원이 될 석유의 공급처로 파악했다. 이러한 동상이몽이 오늘날 중동 문제의 근원을 제공한 건 아닌지 곰곰 생각해볼 문제다. ‘전쟁, 속임수, 어리석은 제국주의 그리고 현대 중동의 탄생’이라는 부제가 내용을 제대로 요약한다.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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