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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보균 칼럼

권력의 파르헤시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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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박보균칼럼니스트·대기자

박보균칼럼니스트·대기자

권력은 독선이다. 그것은 권력의 속성이다. 편견도 커진다. 그 상황은 권력 성공의 장애물이다. 그것은 5년 대통령제의 낯익은 장면이다. 권력 독선의 제어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그것이 유능한 권력의 조건이다.

진실에 대한 용기 있는 직언 #파르헤시아가 권력을 정화 #박근혜 정권의 해경 해체 때 #직언의 집단적 포기 현상 보여 #문재인 초심 ‘국민 모두의 정부’ #권력성공은 진언하는 문화에

파르헤시아(parrhesia)가 있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용어다. 그 단어는 아테네 직접 민주주의 세계의 정치·윤리 덕목이다. 파르헤시아는 대담한 직언이다. 두려움 없이 권력자에게 진실을 말하는 행위다. 그것은 권력의 독선에 제동을 건다.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그 말을 재생시켰다. 사라진 언어의 매력적인 귀환이다.

푸코의 표현은 압축적이다. ‘진실의 용기’-. 푸코는 그 말과 통치술의 관계를 추적했다. 김성도(고려대 언어학과) 교수는 그 분야 전문가다. 그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하는 투박한 직언이다. 조선 시대 목숨을 걸고 하는 상소(上疏)와 비슷하다”고 했다. 파르헤시아의 작동 요건은 행위자의 용기다. 듣는 자의 경청이 필요하다. 하지만 권력의 현실은 그렇게 펼쳐지기 힘들다. 김 교수는 “미국 연방수사국(FBI) 국장 제임스 코미의 사례가 흥미롭다. 러시아 스캔들의 진실을 말하려는 그를 트럼프 대통령이 경질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코미의 발언은 강렬하다. “사람들이 권력자에게 진실을 말하려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모든 리더의 책무(incumbent)”(2013년 상원 인준청문회)라고 했다. 그 구절은 파르헤시아 정신에 다가가 있다. 그 전에 코미는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헤지펀드)의 법률고문을 맡았다. 브리지워터는 ‘급진적인 투명성(radical transparency)’을 내세운다. 투명성은 경쟁력이다. 그는 그 문화를 FBI에 전파하겠다고 했다.

문재인 정권은 해양경찰청을 복원시켰다. 해경은 박근혜 정권에서 해체됐다. 세월호 구조 활동에 실패했다는 이유였다. 그 결정은 책임 전가였다. 하지만 그 조치가 국민적 의심을 잠재우지 못했다. 후유증은 컸다. 공직사회는 냉소와 불만으로 반응했다. 박근혜 정권의 권력기반은 금이 갔다. 해체 과정은 졸속이었다. 해양 시대에 역주행이었다. 하지만 대통령 주변에서 반론은 없었다. 친박은 진실에 침묵했다. 권력 내부의 누구도 용기를 내지 않았다. 파르헤시아의 집단적 포기였다. 그것은 치명적이었다. 권력 전체가 어리석음에 매몰돼 갔다. 정권은 활기를 잃었다. 파르헤시아 없는 정권은 무기력하게 몰락했다.

문재인 정권의 깃발은 탈(脫)원전이다. 정권의 초기 현상은 의욕과잉과 조급증이다. 신고리 5·6호기의 앞날이 불투명해졌다. 국정기획자문위는 민감한 소재를 거칠게 다뤘다. 그런 방식은 고통스러운 불만을 야기한다. 에너지 전공 교수 230명(23개 대학)이 반발했다. 그들의 성명서는 실감난다. “소수 비전문가가 속전속결로 진행하는 제왕적 조치는 원자력계의 사기와 공든 탑을 허문다.” 파르헤시아는 반대의 목소리다. 현명한 정권은 그것을 균형감각으로 활용한다. 하지만 그 같은 열린 자세를 갖추기는 어렵다. 그 때문에 국정의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것은 권력의 낭비다.

파르헤시아 문화가 절실한 분야는 국민 통합이다. 권력은 지지율 하락을 경험한다. 그때 정권은 이념의 지형에 기댄다. 보수·진보의 대립 논리는 참기 힘든 유혹이다. 그것을 국면 돌파 카드로 써먹는다. 그런 풍경들은 한국 정치의 오랜 그림자다. 문 대통령은 “이념의 정치, 편가르기 정치를 청산하겠다”(6일 현충일 추념사)고 했다. 그 다짐의 성취 조건은 명쾌하다. 파르헤시아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런 권력 문화의 조성은 힘들다. 진실은 역대 대통령들을 불편하게 했다. 노무현 정권 때도 비슷했다.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 김병준의 회고다. “노 대통령이 시민사회 원로들을 초대했다. 원로들이 ‘귀를 열어라, 쓴소리를 들어라’고 했다. 노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쓴소리, 바른 소리가 아니다. 국정을 잘 운영할 수 있는 지혜다.’”(『대통령 권력』)

파르헤시아는 직설 이다. 우회적 건의가 아니다. 그 세계는 수사학적 설득의 언어를 배제한다. 하지만 파르헤시아 는 정교해야 한다. 용기는 치밀함으로 커진다. 진실의 직언은 정치적 상상력으로 정교해진다. 그런 과정에서 지혜가 직언 속에 스며든다. 파르헤시아의 통상적 창구는 민정수석실이다. 하지만 진언의 통로는 독점돼선 안 된다. 권력 운영의 노하우는 견제와 경쟁이다. 파르헤시아의 원활한 작동도 같은 이치다. 직언과 정보 생산은 다양해야 한다.

문 대통령은 “이제 우리는 다시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 발언은 영국 총리 처칠의 말을 떠올린다. 처칠의 성공은 초심의 유지였다. 문 대통령은 초심을 확인한다. “저의 꿈은 국민 모두의 정부, 모든 국민의 대통령입니다.” 파르헤시아는 초심의 건강함을 관리한다. 파르헤시아는 권력의 정화장치다. 그것은 권력의 성공 습관이다.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