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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보균 칼럼

문재인의 절묘한 고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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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박보균칼럼니스트·대기자

박보균칼럼니스트·대기자

권력은 언어로 작동한다. 대통령은 말을 생산한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지 보름이다. 언어의 풍광도 바꿨다.

권력은 언어를 생산한다 #“추도식 참석은 마지막이다” #노무현 봉하마을과 결별 #문 대통령, 말로 정권 차별화 #박근혜의 상징언어는 해체돼 #‘비정상의 정상화’ 구호 넘겨줘

23일 오후 노무현 대통령 서거 8주기 추도식은 변화를 확인한다. 추도식 주제는 선명하다. ‘나라다운 나라, 사람 사는 세상.’ - 사람 사는 세상은 노무현 언어의 간판이다. 나라다운 나라는 문재인의 촛불 슬로건이다. 이해찬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노 대통령이 꿈꿨던 세상, 문 대통령이 완성할 세상”이라고 설명했다. 언어 배합은 세련됐다. 그 구절의 위상은 독보적이다. 문재인 시대의 지배언어가 됐다.

권력은 상징을 갖는다. 언어는 정권의 장악력을 확장한다. 문 대통령은 추도식에서 “정상을 위한 노력이 특별한 일이 될 만큼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심각하게 비정상이었다”고 했다. ‘비정상의 정상화’-. 그 표현의 원조는 박근혜 정권이다. 대통령 시절 박근혜의 잦은 외침이었다. 그는 “사회의 근본을 바로잡는 비정상의 정상화 작업에 속도를 내자”고 했다. 박근혜 정권의 언어는 해체됐다. 권력의 파탄은 역설을 낳는다. 과거 권력은 ‘비정상의 정상화’ 대상으로 추락했다. 문재인 정권은 그 언어를 재구성했다. 말은 재충전됐다. 그 구호의 파괴력으로 적폐청산에 나서고 있다.

과거와 현재는 대비된다. 거기에 권력의 언어가 투영된다. 그 순간 비교의 장면은 격렬해진다. 전·현직 대통령의 영욕(榮辱)은 엇갈렸다. 추도식 그날 오전에 박 전 대통령은 법정에 나왔다. 그의 이미지 상징은 올림머리다. 1974년 모친 육영수 여사는 암살당했다. 20대 초반 퍼스트레이디는 올림머리의 격조로 치장했다. 금속제 실 핀으로 고정한 머리다. 하지만 구치소는 금속제를 금지한다. 박 전 대통령은 플라스틱 집게 핀을 썼다. 그렇게 머리를 고정했다. 수갑이 차져 있었다. 그의 어두운 표정에 비감이 서려 있다. ‘피고인 박근혜’로 불려졌다. 그 호칭은 법정에서 초라하게 나뒹군다. 박근혜는 상징적 언어를 잃었다. 그 처지는 권력 파탄을 실감나게 한다.

대통령은 언어의 승부사여야 한다. 문 대통령은 그 면모를 과시했다. “제 임기 동안 (노무현) 대통령님을 가슴에만 간직하겠습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 이 자리 (봉하마을 추도식)에 참석하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그것은 노무현과의 한시적 결별 선언이다. 그 부분은 절묘한 고별사다. 결정적 순간에 내놓은 승부사적 언어다. 통합의 어떤 메시지보다 강렬하다. 문재인 드라마에는 친노의 그림자가 섞여 있다. 그림자 속에는 배타적 우월감, 독선, 편가르기가 있다. 그 다짐은 친노와의 작별로 비춰진다.

말의 힘으로 문재인은 노무현과 차별화됐다. 권력의 정체성은 새롭게 정립됐다. 문재인 시대는 노무현 정권의 답습이 아니다. ‘참여정부 시즌 2’가 아니다. 문 대통령은 “저의 꿈은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다. 참여정부를 뛰어넘어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확장해야 한다”고 했다.

담대한 언어 구사는 지도력의 조건이다. 대통령은 국가의 최고 대변인이다. 문 대통령은 그런 자세로 나섰다. “우리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까지, 지난 20년 전체를 성찰(省察)하며 성공의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 발언은 권력 성공의 방정식을 담고 있다. 성찰은 역대 대통령들의 공과(功過) 분류다. 성찰은 국정 성패의 기억을 해부하는 일이다. 그 추적 작업의 지혜는 명쾌하다. 공적은 온고지신으로 재정리한다. 과오는 반면교사로 삼는다. 세계 일류 국가의 통치 문화는 그렇게 작동한다. 하지만 공적과 과오의 구분은 힘들다. 우리 정치문화는 공적에 인색하다. 과오를 들추는 데 익숙하다. 보수·진보의 대립은 험악하다. 국민통합과 적폐청산은 대립적이다. 둘의 우선순위를 놓고 충돌이 있을 것이다. 완급조절이 정권의 기량이다.

권력 교체기는 긴장된다. 과거 정권의 상징은 위축된다. 문 대통령은 4대 강 사업에 대한 정책 감사를 지시했다. 4대 강은 이명박(MB) 정권의 상징이다. 그 국책사업은 지난 9년간 세 차례 감사를 받았다. MB 측은 정치 보복으로 의심한다. “박 전 대통령의 구속으로 사실상 MB만 남았다. 문재인 정권의 감사는 우파의 구심점을 와해시키려는 의도”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4대 강 사업은 총체적 부실”이라고 규정했다. 대통령의 인식은 가이드라인으로 작동하기 쉽다. 그것이 권력의 위세이며 공무원의 생리다. 그럴 경우 갈등과 미움은 반복된다. 공과를 나누는 선택의 지혜가 투영돼야 한다. 그 조화는 리더십의 과제다.

문재인의 추도식 언어는 비장함으로 마감한다. “우리는 다시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정치는 명분과 도덕성에서 머물러선 안 된다. 좋은 정치는 실질과 유능한 정치여야 한다. 유능한 지도자는 미래의 언어로 무장한다. 그 언어행위가 권력의 성공을 보장한다.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