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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수 헌재소장 후보 "5·18 시민들 유죄 판결, 원죄로 남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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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수(64·)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군사법원 판사로 재직하면서 5·18 시민군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것에 대해 “재판을 마친 후 원죄와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며 사과의 뜻을 밝혔다.

군법무관으로 5·18 참여한 시민들에 유죄 판결 내려 #"검시 때 충격 잊지 못해…군인으로 실정법 거부 못해" #국회 인사청문회서 "제 판결로 고통받는 분들께 사과"

김 후보자는 7일 국회에서 열린 헌재소장 후보 인사청문회에서 “당시 법조경력이 짧은 법관으로서 주어진 실정법을 거부하기는 참으로 힘들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김 후보자의 이력에 대해 철저한 자기반성이 있어야 한다”는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지적에는 “제 판결의 결과로 지금까지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했다.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임명동의안 심사를 위한 인사청문회가 7일 국회에서 열렸다. 김 후보자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오종택 기자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임명동의안 심사를 위한 인사청문회가 7일 국회에서 열렸다. 김 후보자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오종택 기자

김 후보자는 1979년 12월 1일 입대해 1982년 8월 31일까지 육군 31사단에서 군검찰관으로 복무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이 벌어졌을 때 사망자 검시에도 참여했다. 그가 검시한 시신 중에는 가슴에 자상을 입은 여인의 시신도 있었다. 김 후보자는 “광주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시의 충격과 참담한, 그리고 분노는 지금도 잊기 힘들다”고 했다. 또 “재판 지원을 위해 전국에서 파견된 군법무관들에게 제가 목격한 광주의 실상을 정확히 알리고 이해시키려고 했다”고 덧붙였다.

당시 김 후보자는 여러 명의 시민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광주에서 공수부대원들이 대학생들을 대검으로 찔러 죽였다”고 말해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기소된 마을 이장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당시 그는 판결문에 “전남지역 대학생들의 불법 가두시위가 점차 격렬화되어 계엄군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유혈사태가 발생하자 각종 유언비어가 날조 유포되어 이에 현혹된 일부 시민들까지 가세해 폭도화된 것”이라고 적었다.

1980년 5월 20일 계엄군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버스를 앞세워 차량시위를 벌이는 모습. [사진=5·18 기념재단]

1980년 5월 20일 계엄군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버스를 앞세워 차량시위를 벌이는 모습. [사진=5·18 기념재단]

시민군이 탄 버스를 운전했던 운전사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판결도 논란이 됐다. 김 후보자는 운전사가 경찰 저지선을 뚫는 과정에서 경찰 4명이 사망하고 4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건이라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 인정된다며 사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은 95년 제정된 5·18 특별법에 따라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김 후보자가 유죄 판결을 내린 사건 중 7건이 재심에서 무죄로 뒤집어졌다.

그는 “권력에 맞선 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진심으로 우러러 보았지만, 군인 신분으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고 했다. 또 “광주 영령들의 억울한 희생을 역사에 새긴다는 심정으로 그들의 희생을 조사하고 기록했다”며 “재판을 마친 후 법의 본질과 법관의 역할, 올바른 재판의 의미에 관한 평생의 화두를 짊어지게 됐다”고 덧붙였다.

김 후보자는 1982년 군복무를 마치고 법관으로 임용됐다. 5·18 당시의 경험을 ‘내면의 거울“이라고도 했다. 김 후보자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염원했던 민주주의와 헌법의 정신은 판사 생활을 하는 동안 줄곧 큰 기둥이자 버팀목이 되어 줬다“고 말했다.

5·18기념재단과 민주유공자유족회, 구속부상자회, 부상자회 등 5·18 관련 단체들은 지난달 31일 회의를 열어 “김 후보자의 5·18 판결은 논란이 될 이유가 없다”며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 당시 계엄 아래 군법회의에서 중위였던 김 후보자의 역할이 제한적이고 미미했다고 판단했다는 이유다.

유길용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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