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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형 흑자 벗어났다고? “통계의 착시”…샴폐인 터트릴 때 아냐

중앙일보

입력

지난해 영업이익(1조6929억원)을 전년(8176억원)보다 두 배 정도 늘려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기록한 에쓰오일. 하지만 이 회사의 지난해 매출액(16조3218억원)은 2015년(17조8902억원)보다 8.8% 줄었다. 30대 기업 중 지난해 매출액 증가율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곳은 20개(66%)나 된다. 특히 삼성전자·포스코·SK에너지·LG화학 등 9개사는 에쓰오일처럼 영업이익이 늘었지만 매출은 감소하는 이른바 ‘불황형 흑자’를 기록했다. 물건을 더 많이 팔아서 자연스럽게 이익을 많이 내기보다는 ‘마른 수건 쥐어짜기’ 식으로 원가를 절감하거나 재고자산 평가 이익 때문에 흑자를 기록하는 곳이 많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최근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올해 1분기 경제성장률(1.1%)이 6분기 만에 상승세로 전환했고, 설비투자·수출경기 관련 지표도 줄줄이 회복세다. 기업 실적도 마찬가지다. 기업 성장을 판가름하는 대표적 지표 중 하나인 매출액이 지난해 0.27%를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액이 증가한 건 2013년 이후 3년 만이다.
이 때문에 ‘불황형 흑자는 끝났다’는 기대가 이어지고 있다. 경기를 예상하는 데 활용하는 지표인 경기실사지수 역시 오름세다. 가계가 체감하는 경기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보여주는 지표(소비자심리지수)가 5개월 만에 60.8%나 좋아졌다(51→82). 기업이 체감하고 있는 경기 수준(기업경기실사지수·89→99)도 같은 기간 11.2% 높아졌다. 올 들어 가계·기업 모두 ‘경기가 호전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민간 연구기관들은 여전히 ‘샴페인을 터트리긴 이르다’는 경고에 나섰다. 한국경제연구원은 4일 '한국 기업의 경영성과' 보고서에서 “본격적인 경기회복으로 보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했다. 같은 날 현대경제연구원도 '최근 경제 동향과 경기판단' 보고서를 내고 “경제 전망을 낙관하기는 이르다”고 발표했다.
 연구기관이 경기 회복을 낙관하지 않는 건 ‘통계의 착시’에 근거한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1분기 경제성장률이 상승세로 전환한 건 맞지만, 여기서 ‘건설투자 기여도(1.1%포인트)’를 제외하면 0%가 된다”고 설명한다. 진짜 경제가 좋아졌다면 민간소비나 설비투자 등이 늘었어야 하는데, 국내총생산(GDP)의 절반을 차지하는 민간소비는 여전히 부진(0.2%)하고 순수출(-0.8%)은 오히려 마이너스다.
주원 실장은 “경제성장을 전적으로 건설투자에 기댄다는 것은 한국 경제 구조가 기형적이고 취약하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경기가 언제 회복될지 몰라 비용 절감에 목을 매는 불황형 흑자 상황에서 기업들은 투자에 적극 나서기 어렵다. 언제 다시 경기가 침체할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가 진짜 불황형 흑자에서 벗어났다면, 기업들도 이익을 낸 돈으로 투자를 시작하는 게 정상이다.
물론 투자 관련 지표도 회복세다. 설비투자지수 증가율은 올해 1분기 평균 17.7%를 기록했다. 경기가 회복하면 시장 수요가 증가하기 때문에 미리 기업들이 수요에 대응하려고 설비에 투자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 역시 현미경을 끼고 들여다보면 애매한 측면이 있다. 3월 23.3%를 기록했던 설비투자지수 증가율이 불과 한 달 만에 절반 수준(14.1%)으로 꺾였기 때문이다.
 수출 경기도 비슷하다. 2016년 11월 이후 수출액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 최대 시장인 중국·미국 시장에선 수출액이 2월 정점을 찍고 3개월 연속 증가폭이 줄었다. 주원 실장이 “경제지표는 개선되고 있지만 향후 경기를 낙관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이유”라고 말한 배경이다.
 기업 실적도 허점이 보인다. 전체 기업의 매출액 증가율(0.27%)이 3년 만에 플러스로 돌아섰지만, 절대 매출 규모(2250조원)는 여전히 2012년(2291조원) 수준에도 못 미친다.
또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대기업은 여전히 부진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자산 5조원 이상 대기업 소속 계열사만 분석한 결과 지난해 대기업 매출액(-0.8%)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대규모 고용을 창출하는 제조기업 역시 같은 기간 매출액(-1.7%)이 쪼그라들었다.
김윤경 한국경제연구원 경영분석팀장은 “한국 경제가 창출하는 부가가치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대기업과, 장기적·안정적 고용 창출 여지가 큰 제조업의 성장이 정체한다는 점에서 최근 경제지표는 장기적 경기 회복으로 이어지기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수익성 지표인 영업이익률은 지난해 6%를 돌파했다. 3년 전(4.38%)과 비하면 크게 개선된 수치다. 하지만 이 역시 세부 항목을 뜯어보면 꼭 좋아할 만한 일은 아니다. 한국경제연구원이 한·중·일 상장사 영업이익률을 비교한 결과 한국 제조기업의 영업이익률(4.7%)이 중국(6.2%)·일본(5.8%)보다 낮았다. 장기 불황에 시달리던 일본마저 한국 영업이익률을 추월한 것이다.
김윤경 팀장은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봐야 한다”며 “단기 경제지표만 보면 기업 실적이 회복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지만 장기적 추세를 보면 여전히 성장이 정체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

경제성장률 1% 돌파? 죄다 건설투자 때문 #설비투자도 증가? 한 달만에 확 꺾여 #수출액 증가세? 비중 큰 중국·미국은 감소 #전체 기업 매출 증가? 그래봤자 2012년 수준 못 미치고 #장기적·안정적 고용 창출하는 제조업은 여전히 마이너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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