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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졸리앙의 서울이야기

(30) 황소의 능력과 책 읽기 예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서점서 스피노자 만나 보라, 초연해지는 지혜 얻는다

얼마 전부터 나는 노골적인 욕심을 품고 거리의 고물상과 헌책방을 헤집고 다닌다. 인류가 남긴 보물, 진흙 속에 묻혀 있을 소중한 고전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서가마다 얼마나 대단한 발견, 행복한 만남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서점 문을 밀고 들어가 책 몇 장 들춰 보기 무섭게 위대한 정신이 우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아픈 가슴을 어루만져준다.

책 속에서 만나는 영혼의 예술가들은 진정한 세상의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이끌기 위해 혼신을 바쳐 온 참다운 친구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들을 못 본 척하는가. 페이스북의 시대, 디지털 만능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그런 진득한 친구들이란 얼마나 드물고 소중한 존재인가.

오늘도 나는 발자크와 유르스나르, 헤밍웨이, 졸라, 헤르만 헤세 등 정신의 빛나는 모험가들이 진을 친 도심의 거리를 용감하게 파고든다. 시간의 흔적으로 누렇게 색이 바랜 그 저작들이 누군가 깨어 있는 영혼의 감사할 줄 아는 손길을 만나면 좋겠다.

영혼은 고유의 절기와 리듬을 갖는다. 서울 생활을 앞두었을 때 나는 비대해진 내 서가의 책 대다수를 로잔의 교도소에 기증하고 떠났다. 그러나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고 있는 지금 나는 다시 고전을 찾아 나선다. 한 권의 책은 약국과도 같고, 유용한 도구 상자나 세상을 향해 열린 창문과도 같다. 서점 순례는 그저 시간이나 때우는 게으름 부리기가 아니다. 스피노자와 만나는 시간은, 체념으로 행복에 이르기보다 행복을 통해 초연함에 이르는 인간의 놀라운 지혜와 조우하는 시간이다. 모리아크의 책장을 들추는 시간은, 인간의 심성을 일그러뜨리는 온갖 정념 너머로 순수한 영혼이 건재함을 보여주는, 그리하여 현상 너머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이 중요함을 배우는 시간이다. 단 한 시간만 키르케고르와 담소를 나누어 보라. 허세와 허위를 걷어내고 가면과 가식 없는 진실한 삶으로 직진할 용기를 얻을 수 있으리라.

우선 텔레비전과 인터넷 전원부터 끄자. 휴대전화를 호주머니나 가방 속에 넣자. 그 순간부터 생각지도 못한 용기와 도전은 시작된다. 삶과 죽음의 진실을 향한 위대한 투쟁 속에서, 자기 자신과 세상에 굴하지 않고 혼신을 다해 펜을 잡았던 저 진정한 친구들이 준비된 우리의 손길을 이끌 것이다. 니체는 책을 가까이하려는 사람에게 이런 조언을 남겼다. “독서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오늘의 인간이 너무도 쉽게 간과하는 어떤 능력으로 각자 무장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황소의 능력이다. 한번 먹은 음식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는 황소의 왕성한 능력.” 이 온순하면서 부지런한 반추동물이 일용할 양식의 맛을 음미하기 위해 잘 씹고 잘 삼키는 것도 모자라, 되새김질까지 하는 지혜와 즐거움을 우리 모두 본받자.

가끔은 이미 읽은 책에 나도 모르게 손이 가는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책이 주는 기쁨을 이웃과 나누라는 뜻이니, 주저 말고 선물하자. 무엇보다 소중한 당신의 경험을 사람들과 공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책읽기의 느긋하고 행복한 경험을 우리는 언제부터 힘들고 지루한 노역의 하나로 전락시켰을까. 이제라도 늦지 않다.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어줄 책 읽기의 흥미, 그 아름다운 호기심을 열심히 퍼뜨리자.

스위스 철학자/번역 성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