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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거리가 변하고 있다"|쇼핑인파에 디스코테크도 개장|"10∼15년전의 중공을 연상시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전 워싱턴 포스트지의 동경특파원을 지낸 「셀릭·해리슨」미카네기 국제평화연구소 수석연구원은 72년 북한을 방문한 이래 15년만인 지난 9월 다시 북한을 방문, 그가 느낀 북한사회의 변화상을 홍콩에서 발행되는 파 이스턴 이커노믹 리뷰지 12월3일자에 기고했다. 다음은 『위대한 추종자』란 제목으로 실린「해리슨」씨의 글을 요약한 것이다.
북경에서 평양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앞자리에 앉은 한 영국 배우는 이탈리아영화사와 북한의 국제합작영화회사가 합작으로 현재 북한에서 촬영중인 영화대본을 보여주었다.
『지옥의 계곡』이란 이 영화대본은 은둔적이고 교조적이며 유머가 없는 전통적인 북한체제를 묘사하고있다.
이 영화는 유럽-아시아 혼혈의 금발미녀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강대국에 의해 운영되는, 경비가 삼엄한 비밀 실험실에서 초능력 거인을 만드는 연구를 하고 있는 악덕과학자들을 위해 용병을 모집하는 광경으로 시작된다. 최신의 최음제를 개발하고도 위장하고, 납치된 10대들을 상대로 과학자들이 실험하고 있는 사이 선량한 유럽 과학자들이 용병을 이끌고 쳐들어온다는 줄거리다.
이 영화는 영화적인 요소도 있지만 영화광으로 북한의 유아단계인 영화산업을 지도하고 있는 김일성의 후계자 김정일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이기도 하다.
북한이 이 같은 영화를 만들고 다른 분야에서도 서구와 합작을 추진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경제적 낙후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화가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영화사의 한 관계자는 『북한은 기술적인 서비스만 제공할뿐 서방에 무엇을 팔것인지는 파트너가 결정하도록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같은 새로운 분위기는 평양을 자주 방문하는 사람에게 여러 측면에서 놀라움을 준다. 김일성배지는 모택동복이 아닌 서구식양복에 달고 있는 것을 볼수있다.
박물관이나 기념탑만이 높게 솟아있던 평양거리에 8개의 높은 호텔이 들어서 있고 6개의 호텔이 신축중이다.
호주와 홍콩·영국관광객들이 들어오고 있으며 호텔3군데에서는 디스코테크가 문을 열었으며 호텔식당에서는 로크 뮤직이 『쿵쾅』 거린다.
72년 방문때와는 달리 외교관이나 외국기업인을 만나는데 제약이 적고 호텔주변을 산책할 수도 있었다. 『이런 현상은 10∼15년전 전환기의 중공과 같다』고 한 아시아 외교관은 말한다.
관리들과 대화도중 이견이 있으면 화제를 돌리던 옛날과는 달리 통일문제, 서방과의 대화, 북한경제문제에 대해 자신들과 다른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려 한다.
한국에 대한 그들의 인식에도 새로운 현실주의가 등장, 서방과의 경제관계개선에는 군사적 긴장관계가 완화되어야 한다는 명백한 인식을 하고 있는것 같다.
북한의 경제를 향상시키는데 서방의 기술도입, 남북한의 군사력감축에도 관심을 갖고 있는것 같다. 한 관리는 42만 병력을 줄인다면 북한경제에 큰 도움이 될것이라고 말한다.
평일에 1만7천명, 주말엔 3만명의 인파가 몰리는 6개의 백화점과 최근 문을 연 지하 쇼핑센터에 가보면 더 질높은 소비재를 사려는 시민들의 욕구가 크다는 것을 알수 있다.
가구나 의류·식품·가사도구등은 15년 전보다 나아지고 품목도 다양해졌으나 대부분의 북한노동자들에겐 아직 비싸고 국제품질기준에는 훨씬 못 미친다.
북한은 84년 외국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한 합영법을 제정, 백화점체인을 허용함으로써 이제는 북한시민들이 자국제품과 일본·서구, 흔치않은 경우지만 미국등지로부터의 수입품을 비교해 볼수 있게 되었다.
재일한국인이 경영하는 「낙원」상가는 북한의 외교관과 제3국에서 일하는 기술자들로부터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세워졌다.
이들 상점에서 물건을 살수있는 자격은 외교관과 외화로 바꿀수 있는 빨간 스탬프가 찍힌 적색 돈을 가진 신흥계급에만 주어진다. 그러나 백화점마다 수백명이 줄을 서 구치지갑이나 동경에서 온 냉동식품을 고르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합영법아래 50개의 합작회사가 설립되었는데 이 가운데 44개가 재일 한국인들이 투자한 것이다. 서독의 한 회사도 합작공장을 설립, 올해 9만벌 (20만달러)의 의류를 수입, 내년엔 이를 배로 늘릴 계획이다.
북한은 7개년 계획 기간중 수출을 3배로 늘릴 계획이나 이를 위해선 기술과 막대한 외자가 요구된다.
평양에 있는 유일한 외국원조기관인 유엔개발계획기구는 북한의 산업시설이 노후해 생산성과 품질을 높이기 위해선 선진기술이 요구되고 있으나 이는 해외로부터만 도입이 가능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많은 변화중에 변치않은것은 김일성부자에 대한 개인숭배였으나 김일성주의는 그때처럼 강하진 않았다.
텔리비전에 서구와 인도·파키스탄·이집트등지에서 수입된 경박스런 영화들이 방영되는 것도 한 변화였고, 뉴스는 외국기사보다는 국내경제문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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