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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사 의사 의견만으로 보험금 지급 거절 못한다

중앙일보

입력

#A씨는 경기도에 위치한 종합병원에서 암판정을 받았다. 정밀한 치료를 위해 국내 최고라는 서울의 한 대학병원으로 갔다. 말기암 선고를 받았다. 수술 후 항암치료 중 보험금을 청구했다. 당연히 보험금이 나올 줄 알았는데 보험회사에서는 의료자문이 필요하다고 했다. 국내 최고의 병원에서 판정을 했으니 뭐가 달라질까 싶어 별다른 의심없이 동의해줬다.

금감원, 의료분쟁 관련 불합리 관행 개선 #“제3의료기관 자문 가능” 반드시 안내해야 #보험사 자문병원 명단은 인터넷 공개 #2005년 이후 안 바뀐 장해분류표도 개정

그런데 한 달 후 보험사에서 돌아온 답변은 황당 그 자체였다. 말기암(4기)이 아니라 상피내암(소액암)이라는 것이다. A씨는 대학병원 전문의에게 말기암 진단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보험사는 의료자문 결과를 토대로 말기암으로 인정해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

A씨처럼 보험금 지급을 놓고 벌어지는 보험계약자와 보험사 간 의료감정(진단) 분쟁이 증가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의료감정과 관련한 분쟁은 2112건이 접수됐다. 2013년 1364건, 2014년 1738건, 2015년 1519건으로 매년 증가 추세에 있다.

장해진단 등 의료사건과 관련해서 보험사는 자문의 소견을 토대로 보험금 지급 여부를 결정하고, 보험계약자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제3의 의료기관에 자문한다. 그런데 계약자가 보험사 쪽의 의사는 물론이고 제3의료기관도 믿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금융감독원은 이에 따라 “의료분쟁의 효율적 해결을 위해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24일 밝혔다.

금감원이 가장 먼저 손보는 것은 의료분쟁의 자율조정 절차 개선이다. 현재 보험약관에서는 의료감정(진단)과 관련해 계약자와 보험사 간 이견이 있는 경우 제3의료기관 자문 절차를 진행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보험사는 이에 대한 설명이나 안내를 하지 않고 (보험사 측) 자문의사의 소견만으로 보험금 지급을 거절하고 있다. 금감원은 따라서 제3의료기관 자문절차에 대한 설명을 의무화하고 자문병원 및 자문내용을 계약자에게 제공하는 절차를 마련키로 했다.

보험사별로 의료자문을 받은 병원명ㆍ전공과목ㆍ자문횟수 등은 금감원 홈페이지에 공개한다. 제3의료기관이 보험사와 관련이 없는 중립적이고 공정한 병원인지에 대한 소비자 불신을 없애기 위해서다. 제3의료기관을 선정할 떄 보험사와 계약자 간 합의가 안 됐거나 계약자가 어떤 곳을 고를지 정하지 못했다면 금감원에 조정을 요청할 수 있다. 금감원은 전문 의학회 등을 통해 계약자가 자문받을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할 계획이다.

자료: 금융감독원

자료: 금융감독원

아울러 의료감정 등과 관련한 분쟁을 전문적으로 다룰 의료분쟁전문소위원회를 신설하기로 했다. 소위원회는 전문의학회 등에서 추천받은 의사들로 구성한다. 현재 금감원 수석부원장(위원장 및 법률가ㆍ의료인 등으로 구성된 분쟁조정위원회에서는 전문화ㆍ복잡화한 의료감정 등과 관련한 분쟁을 충분히 심의할 수 없다는 우려에서다.

한편, 장해보험금 지급의 기준이 되는 표준약관(생명ㆍ질병ㆍ상해보험)상 장해분류표를 현실에 맞게 개정하기로 했다. 이 장해분류표는 2005년에 개정된 이후 10년 이상 그대로다. 장해분류 기준 및 검사방법 등이 실제 장해상태를 적절하게 평가하지 못해 보험사와 소비자간 민원ㆍ분쟁을 유발하고 있다.

개정은 크게 3가지 방향에서 이뤄진다. 먼저, 장해판정 기준을 보완한다. 예를 들어, 현재 ‘귀의 장해’는 ‘청각 기능’만을 기준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귀의 손상으로 평형 기능이 장해를 입었더라도 보상을 받지 못한다. 의료자문 결과 등을 참고해 그간 보장받지 못한 장해상태를 장해분류표에 추가할 계획이다.

둘째, 모호한 장해판정기준을 명확하게 바꾼다. 현재 장해분류표상 장해의 정의ㆍ검사방법ㆍ결과 등이 불분명하게 규정되어 있어 불필요한 분쟁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현재 얼굴에 여러개의 흉터(반흔)이 남은 경우 별도의 판정기준이 없기 때문에 가장 심한 하나의 흉터만을 적용해 장해를 분류, 소비자 불만이 컸다. 여러 개의 반흔의 길이 또는 면적을 합산해 장해를 판정하도록 개선할 계획이다.

그리고, 장해분류표의 용어도 소비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바꾸고 설명도 강화할 예정이다. 예를 들어 ‘순음평균역치’로 설명된 분류표상의 용어를 ‘순음평균역치(잡음이 섞이지 않은 자극에 대한 반응의 평균치)’로 바꾼다. 이해가 쉽도록 신체부위 및 골격계 관련 그림도 함께 넣도록 한다.

이현열 금감원 분쟁조정국장은 “보험회사가 자문의 소견만을 가지고 보험금의 지급을 거절하는 불합리한 관행을 차단해 보험계약자의 권익 제고하겠다”며 “계약자가 신뢰할 수 있는 제3의료기관 선정 및 의료자문
프로세스가 마련되어 의료감정 분쟁 해소 및 예방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국장은 “아울러 장해판정기준의 현실화ㆍ명확화를 통해 분쟁을 예방하겠다”고 덧붙였다. 이같은 제도 개선안은 올 4분기까지 이행될 계획이다.

고란 기자 ne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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