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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존댓말이 없다고 한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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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김세정 런던 GRM Law 변호사

김세정 런던 GRM Law 변호사

대통령의 부인을 무엇이라고 지칭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에 부쳐 영어에는 존댓말이 없으니 속 편하겠다고 하는 말들을 좀 들었다. 그러나 사실은 영어의 경우도 상대방의 나이나 사회적 지위, 나와의 관계에 따라 써야 하는 말투가 때로는 미묘하게, 때로는 명백하게 다르다. 이 점을 유의하지 않으면 경우에 따라서는 적절하지 않게 들릴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60대 중반의 대표 변호사가 사용한 말투를 그대로 다른 파트너 변호사들에게 쓰는 경우 자칫하면 예의 없는 일이 될 수 있다. 딸이 친구들과 쓰는 말투를 사용하면 좀 우스울 수도 있는 것이다.

영어로 대화할 때 ‘결례와 실수의 불안’ 더 커 #말투보다는 늘 말하는 사람의 의도 이해가 중요

더 나아가 영어에도 한국식 존댓말에 해당하는 어법, 즉 상대를 존중하면서 보다 정중하게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은 존재한다. 돈을 좀 달라(“Give me some money.”)고 하는 대신 돈을 줄 수 있겠느냐(“Can you give me some money?”)고 묻는 것처럼 직접적인 요구를 하지 않고 가능한 한 부드럽게 요청을 하는 방식이 이에 해당된다. 끝에 플리즈(please)를 붙이거나, 조동사 can 대신 could를 사용하면 더 정중하게 들린다. 이 경우 ‘돈 좀 주시겠어요?’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표현이 된다.

이러한 고려 없이 한국어를 그대로 영어로 바꾸어 표현하는 경우 꽤나 직설적이거나 공격적으로 들리기 십상이다. 실제로 한국인 클라이언트가 영어로 써서 보낸 e메일을 보고 영국인 동료가 이건 화가 나서 쓴 것이냐고 물어 온 적이 있었다. 출력해 가지고 온 영어 e메일을 읽어 보니 마치 영어로 쓰인 한국어를 읽는 듯하더라. 무슨 이야긴고 하면, 한국어가 모국어인 나로서는 이 한국인 클라이언트가 하고 싶은 말을 한국어로 먼저 생각해 작성한 뒤 그걸 막바로 영어로 바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그 영어를 다시 되짚어 한국어로 번역할 수 있겠구나 싶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저 e메일에 사용된 말투는 한국식 표현일 뿐 받는 사람에게 화가 나서 쓴 것이라거나, 더구나 모욕을 하겠다는 의도가 아님은 나에게는 명백했다. 다만 적절하거나 통상적인 영어 표현이 아니었으므로 일상적으로 영어를 쓰는 사람에게는 자못 당황스럽게 느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알고 나면 영어를 할 때 더 입을 떼기가 어렵다. 혹시나 의도하지 않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또한 남이 나에게 영어로 하는 말 역시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건 별로 정중하게 들리지는 않는데 싶은 표현을 사용하거나 거두절미 딱 잘라 직설적으로 표현해 버리는 경우 같은 때 말이다. 또는 지나치게 친밀하거나 격의 없는 나머지 어쩐지 낮추어 부르는 것 아닌가 싶은 호칭을 사용하는 경우라거나. 이럴 때면 과연 저 사람이 내가 백인, 더 나아가 백인 남성이라면 저런 식의 표현을 ‘감히’ 쓸 수 있을까 싶은 의구심이 생기는 건 단순히 자격지심만은 아닐 게다.

순간적으로 기분 상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럴 때 우선 할 일은 상대방의 의도를 살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렇게 말을 거는 상대의 의도가 친근하게 굴고 싶은 것이라거나 단지 제대로 된 어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면 굳이 정색을 하고 화를 낼 필요는 없지 않겠나. 나도 부지불식간에 유사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을 가능성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어법이 적절하지 않은 경우 상대방도 가능하면 의도를 살펴 좋은 쪽으로 해석해 주기를 나 역시 바라고 있다. 더구나 그리 중하지 않은 문제의 경우 그것을 문제 삼아 좋게 유지될 수도 있는 관계를 경색시키는 것은 현명하다고는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어쩌면 중요한 것은 말투나 어법 그 자체가 아닌 것이다.

물론 이건 상대방의 의도를 좋게 해석할 여지가 있을 때의 이야기다. 의도 자체가 무시나 악의에 의한 것임이 명백해 도저히 그대로 넘어갈 수 없는 상황 또한 존재한다. 아니면 사안이 중요한 것이어서 참아서는 안 되고 부르르 떨쳐 일어나 맞서 싸워야만 하게 생겼거나. 이때 싸우는 언어 역시 상대방의 것임은 외국에서 외국어로 살아가는 자의 비극이라고 하겠다.

김세정 런던 GRM Law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