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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롯머신의 대부 정덕진 사망…파란만장 인생, 홍준표ㆍ박영수와도 인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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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재산 국외도피 혐의로 다시 구속된 정덕진씨의 검찰 출석 모습.           [연합]

1998년 재산 국외도피 혐의로 다시 구속된 정덕진씨의 검찰 출석 모습. [연합]

‘슬롯머신의 대부’로 불렸던 정덕진(76)씨가 최근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 순천향대병원 관계자는 19일 "지난달 말 정씨가 사망해 우리 병원 장례식장에서 가족들이 상을 치렀다"고 말했다. 병원에 따르면 사망 원인은 위암이다. 정씨의 한 지인에 따르면 장례식은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만 모인 가운데 조촐하게 진행됐다.

지난달 위암으로 사망…가족들끼리 조용한 장례 #93년 슬롯머신 수사로 '모래시계 검사' 홍준표 탄생 #2008년 위증 교사 사건 땐 박영수 특검이 변호인

 정씨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그가 1993년 이른바 ‘슬롯머신 사건’으로 수사를 받으면서다. 김영삼 정부의 사정 태풍의 신호탄이었다. 대검 중수부는 정덕진ㆍ덕일 형제로부터 돈을 받거나 청탁받은 혐의로 ‘노태우 정부의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75) 의원, 엄삼탁(2008년 사망) 병무청장 등 정ㆍ관계 유력자 10여 명을 구속했다. 당시 서울지검 강력부 소속으로 중수부에 파견돼 정씨를 구속했던 인물이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였던 홍준표 전 경남지사다.

 이 사건은 SBS 드라마 ‘모래시계’(1995년 작)의 모티브가 됐고, 홍 전 지사는 이후 ‘모레시계 검사’로 불리게 됐다. 정씨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조사 도중 홍 검사가 드라마 작가를 데리고 올텐데 그동안 지내온 생황을 쭉 설명해주라고 했다”고 드라마 제작에 관한 후일담을 풀어놓기도 했다. 정씨는 이 사건으로 1심에서 징역 2년6월의 실형을 받았지만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 1996년 8·15 특사로 사면ㆍ복권됐다.

1993년 7월6일 첫 공판에 출석하는 정덕진씨. 정씨는 이후로도 여러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중앙DB]

1993년 7월6일 첫 공판에 출석하는 정덕진씨. 정씨는 이후로도 여러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중앙DB]

이 사건 수사과정에서 정씨는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2013년 사망)의 활동을 지원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훗날 정씨는 김태촌과의 인연을 2002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정확한 연도는 모르겠고 1980년대 초였습니다. 저를 보자고 해 ‘또 깡패놈이 업소 뜯어가려고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홀리데이인 호텔 2층 커피숍인가에서 만났는데 밖에 부하 60여 명이 서 있었어요. 앉자마자 권총부터 꺼냈습니다. ‘야. 네가 뭔지는 잘 모르지만 이거 하나면 너 먼저 죽어’하니까 태촌이 얼굴이 노랗게 질리더라구요.” (2002년 오마이뉴스)

 이후 김태촌은 정씨를 형님으로 모셨다. 정씨는 이때 들고 다니던 권총을 1988년 서울 올림픽 직전 불법무기 자진신고 기간에 서울 강남경찰서에 신고했다고 한다. 정씨는 당시 인터뷰에서 “정치인들이나 검찰 고위 인사를 만난 적도 없다”며 “특히 조폭 수괴 운운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씨와 관련된 구설은 그 이후에도 계속됐다. 정씨는 1998년 미화 450만 달러를 밀반출했다는 혐의로 구속됐고, 2003년에는 필리핀에서 상습 도박을 한 혐의로 다시 구속돼 처벌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서울 한남동에 있는 자신의 자택 매매과정에서 매매계약 해지를 거부하는 매수인에게 공기총을 들이대며 협박했다는 혐의로 경찰과 검찰의 수사를 받기도 했다.

 정씨는 박영수 특별검사와도 인연이 있다. 법무법인 강남의 대표변호사였던 박 특검이 2015년 이모(64)씨가 휘두룬 흉기에 왼쪽 얼굴과 목 부위를 찔리는 사건의 배경에 정씨가 있다. 범인 이씨는 정씨의 채무자였고, 박 특검은 정씨의 변호인이었다. 두 사람의 갈등이 형사 사건으로 비화됐을때 박 특검이 정씨의 무혐의를 이끌어 낸 것에 대한 보복 범행이었다.

 서울사대부고를 중퇴하고 15살 때부터 암표 장사를 하며 돈을 모으기 시작한 정씨와 동생 덕일씨는 한때 1조원 이상의 재산을 모아 거부 반열에 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희전호텔ㆍ상원호텔ㆍ킴스호텔 등 호텔 5개와 9개의 슬롯머신 업장을 운영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1990년대 이후 슬롯머신 업계를 떠난 정씨 형제는 사채업 등으로 재산을 굴리다 2007년 제주 신라호텔 카지노를 인수한 뒤 제주도에 카지노를 포함한 대규모 복합 리조트 사업을 추진하다가 큰 손해를 봤다고 한다. 사정당국 관계자는 "전성기 때에 비하면 재산은 많이 줄어든 것으로 안다. 그래도 보유 부동산 등 남긴 재산의 총액이 수백억원 이상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송승환 기자 song.seung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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