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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점 아래의 사람들, 4950.2225명...‘한 명’으로 인정 못 받는 시간제 비정규직

중앙일보

입력

[문재인대통령,인천공항 비정규직 노조 방?문재인대통령,인천공항 비정규직 노조 방문12일 오전 문재인대통령이 인천공항공사 4층 CIP 라운지에서 열린 '찾아가는 대통령.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열겠습니다!>' 행사에 참석해 참석자들과 대화하고 있다.2017.5.12.청와대사진기자단/매경=김재훈기자

[문재인대통령,인천공항 비정규직 노조 방?문재인대통령,인천공항 비정규직 노조 방문12일 오전 문재인대통령이 인천공항공사 4층 CIP 라운지에서 열린 '찾아가는 대통령.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열겠습니다!>' 행사에 참석해 참석자들과 대화하고 있다.2017.5.12.청와대사진기자단/매경=김재훈기자

424.64, 561.88, 394.23...

공공기관 시간제 비정규직, 정부 집계방식상 1미만으로 집계 #2시간 근로시 0.25명, 3시간 근로시 0.375명... #직종 피라미드 최하단의 존재 상징하는 듯 씁쓸 #전일제 비정규직, 파견근로자의 정규직 전환 과정서 희생양 우려 #“소외되거나 희생되지 않도록 정책적 배려 필요”

무슨 숫자일까. 언뜻 봐서는 인터넷 IP주소를 나열한 것 같기도 하고, 첩자들이 암호로 사용하던 난수표 같기도 하다. 정답은 몇 개 공공기관들의 비정규직 직원 수다. 0.64, 0.83, 0.23명이 존재하는 건 아닌데 어떻게 이런 숫자가 나올 수 있을까. 인격체로서의 인간은 1이 아닌 절반이나 4분의 1만이 존재할 수 없지만, 피고용인으로서의 인간은 다르다. 시간제 비정규직, 즉 파트타임 직원들의 존재 때문이다.

지난 22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비정규직 청소노동자들이 집회를 열고 '최저임금 1만원, 비정규직 철폐'를 촉구하고 있다.[뉴시스]

지난 22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비정규직 청소노동자들이 집회를 열고 '최저임금 1만원, 비정규직 철폐'를 촉구하고 있다.[뉴시스]

예를 들어 하루 8시간을 일하는 전일제 근로자를 1명이라고 한다면 2시간 근로자는 0.25명, 3시간 근로자는 0.375명, 4시간 근로자는 0.5명이 된다. 중소기업은행의 경우 424.64명의 비정규직이 존재하고, 이 중 42.64명이 시간제 근로자다. 경상대학교병원의 비정규직 561.88명 중 20.88명이 시간제 근로자다.

시간제 비정규직 수가 많은 20개 공공기관

시간제 비정규직 수가 많은 20개 공공기관

‘직종 피라미드’의 최하단에 위치하는 시간제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은 집계 방법이다. 정부세종청사에서 일하는 한 시간제 근로자는 “가뜩이나 열악한 지위와 낮은 급여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데, 정부에서 우리를 제대로 된 한 명의 사람으로 인정도 안 해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라고 말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라는 새 정부 역점 사업이 대대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시간제 비정규직은 환호의 물결에서 한 발 떨어져 있다. 오히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와중에 유탄을 맞아 알량한 자리마저 위태로워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비정규직은 크게 세 종류다. ▶온종일 일하는 전일제 근로자▶일정 시간만 일하는 시간제 근로자▶파견·용역 등 간접고용 근로자로 나뉜다. 간접고용 근로자는 사실 비정규직의 범위 내에 있지는 않다. 기획재정부도 공공기관 비정규직 통계를 작성할 때 간접고용 근로자는 제외한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인천국제공항공사를 방문해 간접고용 근로자의 정규직 직접고용을 약속을 받아내면서 간접고용 근로자들도 이번 정부가 규정하는 비정규직의 범위에 사실상 포함됐다.

이에 따라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비용은 더욱 커지게 될 전망이다.  시간제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우선 순위에서 밀리면서 다른 두 형태의 근로자들 만큼의 수혜를 받지 못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공공기관 운영법상 공공기관의 인건비는 매년 총액 한도를 정해두고 그 한도 안에서만 운용해야 한다. 10조원의 추가경정예산 편성이 예정돼 있지만 81만개 일자리 공약 이행을 위한 공무원 충원에 우선적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크다. 추가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공공기관들은 기존 정규직들의 급여를 깎아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비정규직들에게 지급해야 할 수도 있다. 기존 정규직들의 반발은 불을 보듯 뻔하다. 결국 시간제 근로자들을 줄여 비용을 절약하려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 문 대통령의 ‘비정규직 제로시대’ 천명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의 발언이나 대선 후보 시절 공약 등에서 시간제 비정규직 근로자들까지 배려하겠다는 의지는 찾아보기 어렵다. 기업 입장에서도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고용하는 시간제 근로자들까지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주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다. 물론 시간제 비정규직의 일부는 잠시 아르바이트 등을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상당 수는 좋은 일자리를 잡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시간제로 생활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린 사람들이다.

이미 공공기관들은 비정규직을 줄이라 했더니 간접고용을 늘리는 부정적 풍선효과를 보인 적이 있다. 2012년 4만5000여명이던 비정규직은 1분기 현재 3만7408.2225명으로 줄어들었지만, 같은 기간 간접고용 인력은 6만3117명에서 8만3299명으로 늘어났다. 이번에는 이같은 시간제 근로자들이 풍선효과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시간제 근로자들은 1분기 현재 4950.2225명으로 전체 기간제 비정규직의 13.2%를 차지한다. 정부 집계 방식이 아니라 한 명을 1로 산정해 집계하면 실제 인원 수와 비중은 이보다 더 많아지고 높아진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아르바이트생 등 학업 등을 위해 자발적으로 파트타임을 선택한 사람들은 괜찮지만, 전일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비자발적 파트타임 근로자가 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정책 추진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정책적 배려도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세종=박진석 기자 kaila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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