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책 읽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30호 29면

공감 共感

경복궁 옆길, 광화문에서 삼청동으로 올라가는 길로 꺾어지면 대한출판문화협회 건물이 있다. 검은 벽돌의 나지막한 건물에 커다란 현수막이 내걸렸다. ‘책 읽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무슨 뚱딴지 같은 이야기인가? 지금까지 대통령들은 책을 읽지 않았다는 이야기인가, 그 뜻이 아리송하다. 아마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선 주자들에게, 혹은 그 주변의 힘 있는 사람들에게 책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수사일 터.

영상·게임·한류는 전폭 지원하면서 #출판은 사양산업으로 여기는 풍조 #'인쇄된 것만 출판, 출판은 문화활동' #편견 깨고 미래형 산업으로 육성을

대통령은 무척이나 바쁜 직업이다. 기록에 따르면 40년 전에도 우리나라 대통령은 한 해 동안 국내인사 4286명, 외국인사 207명을 만났다고 한다. 출장은 연간 183회, 청원과 민원은 하루에 70건을 처리해야 했다. 지금은 더 바쁠 터. 그 바쁜 일과 속에서 책을 읽었을까. 실제로 부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은 휘몰려 오는 일과 스케줄 사이에 어쩌다 백지처럼 텅빈 공간이 생기면 술을 찾았다고 했다.

요즘 대통령들은 짬이 나면 TV를 볼까,게임을 할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대통령을 비롯해서 정부의 정책을 만드는 많은 사람들이 출판을 사양 산업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문화체육관광부의 편제에서 문화콘텐츠산업실 아래 미디어정책관, 그 아래 출판인쇄산업과에서 출판과 관련된 일을 담당한다. 재미있는 것은 영상콘텐츠산업과, 게임콘텐츠산업과, 대중문화산업과 등 최근에 한류를 대표하면서 제법 큰돈을 벌어들이는 분야들은 콘텐츠정책관 아래 두고 있으면서 출판은 인쇄와 묶어서 다시 미디어정책과, 방송영상광고과와 함께 미디어정책관 아래 두었다. 영상·게임·대중문화 등은 생산적인 산업으로 묶어 지원하지만 쪼그라드는 출판은 인쇄와 묶어 검열 혹은 통제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명백하다.

출판을 진지한 산업의 분야로 여기지 않으니 경제적인 효과를 염두에 둔 대규모 지원은 생각할 수도 없을 것이고 지원은 게임과 영상, 그리고 가요 등 대중문화 쪽으로 집중된다. ‘책 읽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는 이야기는 이런 편견에서 벗어나 달라는 요구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편견은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인쇄된 것만 출판이라는 편견. 수 천 년간 종이는 인류의 문명을 실어 나르는 그릇으로 훌륭한 역할을 해 왔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출판이 종이와 가깝고 그 위에 내용을 입히는 인쇄와 가까웠던 이유는 활용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매체 형태였기 때문이다. 출판은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 형태가 무엇이든 전자책을 포함한 디지털 출판도 엄연히 출판이다. 서울국제도서전을 준비하면서 웹툰과 전자출판을 한 곳에 모으려는데 그 전시와 관련된 정부의 예산은 종이 매체와 디지털 매체를 엄격히 구분해 책정되어 있어 함께 진행하는 데 애로가 많았다.

다른 하나는 출판이 산업이 아니라 문화 활동이라는 편견. 물론 출판은 문화 활동이지만 엄연히 하나의, 그것도 규모가 큰 산업이다. 온갖 돈이 되는 콘텐츠들에 다른 이름을 달아 빼앗아 갔는데도 여전히 4조원 규모의 산업이다. 그런데도 대통령과 정부가 출판을 대하는 태도는 산업으로 생각하지 않고 예술 장르의 하나로 보는 경우가 많다. 출판과 문학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출판 관련 정책은 늘 표를 사 주거나 예술가들에게 지원금을 주는 것과 유사한 형태에 머무르고, 어떻게 하면 산업으로서 이 분야를 발전시킬까를 고민하는 사람이 없다.

나는 종이와 디지털에 출판되는 것의 거래 규모를 다 모으면 지금 추산하고 있는 규모보다 몇 배, 몇 십 배는 큰 출판 산업의 실체를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산업이 경제적 효과와 고용의 측면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고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도 큰 부가가치를 생산할 미래형 산업이라고 믿고 있다.

새로운 후보들이 결선 투표를 앞두고 있어 대통령 자리에서 곧 물러날 프랑스 올랑드 대통령의 기억이 새롭다. 한국이 주빈국이었던 파리도서전에 온 올랑드 대통령은 형식적으로 시간만 때우고 가지 않고 여러 시간 머물며 책들을 둘러보고 독자들을 만났던 장면을 잊을 수 없다. 덕분에 문화부 장관은 매일 도서전을 찾았다.

이틀 후면 우리도 새 대통령을 맞게 된다. 책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가치뿐만 아니라 산업적 효과와 의미까지 꿰뚫어 볼 줄 아는 통찰력 있는 대통령을 기대한다. 마침 새 대통령 취임 한 달 후엔 서울국제도서전(6월14~18일)이 열린다. 도서전의 모습을 탈바꿈하기 위한 출판계의 노력도 진지하다. 이전의 관변 행사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습으로 출판 산업의 미래를 가늠할 이 자리에서 책 읽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주일우
이음 대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