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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명현의 별 이야기

우리들 자신을 위한 행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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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명현 과학저술가·천문학자

이명현 과학저술가·천문학자

지구의 날인 4월 22일 미국의 워싱턴을 비롯한 전 세계 600여 개 도시에서 ‘과학을 위한 행진(March for Science)’ 행사가 열렸다. 워싱턴에서는 4만 명 정도가 행진에 동참했다. 영문 위키피디아에 올라온 자료를 보니 북극에서도 3명의 연구원이 행진을 하며 이 행사에 참가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울과 부산 두 곳에서 공식 행사가 열렸다. 서울에서는 1000명 정도 참가한 것으로 나오는데 부산 행사에 대한 자료는 아직 올라와 있지 않다.

‘과학을 위한 행진’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됐다. 트럼프 대통령 자신이 기후변화를 부인할 뿐 아니라(백악관 홈페이지에서 기후변화 관련 내용이 모두 삭제됐다) 백신회의론자나 진화론을 부인하는 창조론자들이 트럼프 행정부의 요직에 포진하고 있다. 과학적 증거를 부인하는 태도로 일관하는 이들은 과학 예산도 삭감했다.

주최 측에서 조사한 ‘과학을 위한 행진’ 참여 동기를 보면 ‘과학적 사실과 증거를 갖고 정책을 만들 것을 행정 당국에 촉구하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제일 많았다. 비과학적이고 비상식적인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경고가 ‘과학을 위한 행진’의 핵심 가치임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7 함께하는 과학행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바른 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과실연)과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가 이 행사를 이끌었다. 과학의 가치와 위상을 바로 세우고 시민들의 삶과 함께하는 과학을 보여주겠다는 것이 이 행사 주최 측의 취지였다. 실제로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는 서울시립과학관·국립기상과학원·걸스로봇·페미회로 등 여러 단체에서 부스를 설치해 직접 시민들을 만났다. 자유발언대도 마련해 과학과 삶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토해냈다. 1000여 명의 시민과 과학자들이 과학을 위해, 삶의 가치를 위해, 그리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같이 행진했다.

촛불이 타올랐던 광화문광장에서 이뤄진 이 작은 행진은 비상식을 몰아낸 여세를 몰아 반과학적이서 반민주적인 우리들 속의 트럼프, 우리들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박근혜를 몰아내는 불씨가 될 것이다. ‘과학을 위한 행진’은 과학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이고 비민주적인 세상이 바뀔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런 세상을 위한, 그런 세상에서 살 권리가 있는 우리들 자신을 위한 행진이다.

이명진 과학저술가·천문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