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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정당 맥 못추는 TK서 희망을 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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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8호 31면

김진국 칼럼

이달 중순 대구에 갔다. 그때 만난 몇 사람의 이야기는 그 무렵 대구 분위기를 요약해주는 것 같다. 50대 후반을 넘긴 분들은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를 지지했다. “(문재인 후보뿐 아니라) 안철수도 믿을 수가 없어. 홍준표가 말은 바로 하더만.” 하루 전 대선후보들의 TV토론을 평가했다.

홍·문·안 후보도 오차범위 각축 #지역할거는 ‘말뚝정치’ 가져와 #정치 부패, 중도세력 설 땅 잃어 #새 정부, 선거제도 개편·개헌 해야

40대와 50대 중반이 안 된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문재인이 (대통령이) 안 되게 하려면 안철수를 찍어야지. 유승민이 말을 잘 하던데, 홍준표나 유승민은 찍어 봐야 어차피 대통령은 안 될 거라.” 옆에서 듣고 있던 80대 노인은 불편한 듯이 말했다. “유승민은 배신자 아이가.”

다른 곳에서 만난 한 60대 남자도 대구 사람들의 고민을 전해 줬다. “친구들을 만나면 남자들은 안 돼도 홍준표를 찍어서 표를 모아 줘야 한다고 하고, 여자들은 문재인 안 되게 안철수 찍어 줘야 한다고 말하더라고요.”

이들의 말이 전체 여론이라고 할 순 없다. 여론조사 결과를 봐도 대구·경북 지역에서 안철수 후보의 지지도가 출렁이고 있다. 그런데도 이 지역에 그런 고민이 공론화되고 있는 건 사실이다. 박정희 정부 이후 한국 보수 정치의 근거지인 대구에서 말이다.

아직도 지역 요인이 한국 정치의 큰 변수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렇지만 희망을 본다. 지역 내에 서로 다른 의견들이 공존하기 시작한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경쟁이다. 경쟁하는 후보를 비교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유신 시절, 5공화국 때도 지방에 여야 정치인이 함께 있었다. 권위주의 체제인데도 그랬다. 그런데 19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소선거구제를 도입하면서 달라졌다. 마치 봉건사회의 영지처럼 쪼개졌다. 득표율과 의석수가 서로 맞지도 않았다. 전국 득표율 23.8%인 민주당은 59석을 얻었는데, 19.2%를 얻은 평민당은 70석을 차지했다. 91년 3당 합당으로 지역주의는 정말 고질병이 됐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보수세력의 본거지인 대구·경북에서 진보성향 후보가 나란히 1, 2등을 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홍준표 후보가 1위를 탈환했다는 한국갤럽 4월 3주차 조사에서도 홍준표, 문재인, 안철수 후보가 겨우 1, 2%의 오차 범위 안에서 경합하고 있다.

정말 고질병이 나을 수 있을까. 변화를 가져온 다수 정당 체제는 대통령 선거 이후에도 유지될 수 있을까. 선거 이후 어떤 변화가 올까.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이후 운동장은 크게 기울었다. 보수진영의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와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 지지율을 합쳐도 10~15%다. 물론 일부 보수 유권자들이 안철수 후보에게 전략적 지지를 한 영향이 크다. 따라서 국민의 마음이 바로 후보 지지율과 같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전략적 지지와 상관없는 정당 지지율을 봐도 크게 다르지 않다. 21일 갤럽조사에서는 자유한국당(9%)과 바른정당(5%)을 합쳐도 14%다. 후보 지지율과 거의 일치한다. 안철수 후보(31.3%)와 국민의당(19%) 지지율 사이에 차이는 있지만 보수정당 지지율이 한참 못 미친다. 민주당(40%)에는 턱없이 뒤처진다.

‘샤이(shy) 보수’가 있을 수 있다. 전략적 선택을 한 표가 돌아갈 수도 있다. 최순실 사태에 충격을 받아 일시적으로 돌아선 분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요소를 모두 감안하더라도 여론조사 결과는 정당 이념의 중심축이 좌클릭할 여지를 보여 주고 있다. 적어도 최순실 사태에 대한 분명한 정리 없이는 이전 상태로 회복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현재 누가 집권해도 국회 과반 의석이 안 된다. 가장 유력한 더불어민주당도 119석이다. 32석은 더 있어야 과반이다. 국민의당(39석)이나 바른정당(33석)과 손을 잡는다면 과반이 확보된다. 국민의당(39석)은 말할 것도 없다. 연정이 불가피하다는 말이다. 더구나 국회 선진화법을 고치지 않는 한 협치(協治)는 필수다.

어쩌면 합당이나 의원 빼가기로 변화를 꾀할 수도 있다. 특히 국민의당은 여러 가지 변화 가능성이 있다. 대선에서 이긴다면 새로운 보수, 내지 중도세력의 구심점이 될 수 있다. 좌우에서 흡인력을 작동할 수 있다. 하지만 선거에서 지고, 특히 호남에서 크게 밀린다면 존립에 위협을 받을 수 있다. 반문(反문재인) 정서에 따른 지지는 어차피 허수(虛數)다. 소속 지역구 의원 26명 중 23명이 호남에서 당선됐다. 자칫 노무현 정부 이후 일부 호남세력이 분가(分家)했던 정당들과 비슷한 처지가 될 수 있다.

좌우 정당은 대칭성이 있다.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면 공격적인 자유한국당의 존재감이 커진다. 보수 유권자와 공감대가 넓어지기 때문이다. 선거 후반 안보 이슈가 부각되면서 홍준표 후보가 안철수 후보의 표를 잠식하고, 유승민 후보가 떠오르지 못하는 것은 그런 이유다. 그렇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 문제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는 한 한계는 분명하다. 여기에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이 들어갈 공간이 생긴다.

내년 6월 지방선거 역시 지역별로 판세가 드러날 가능성이 있다. 또 다시 정당들의 지역할거가 분명해질 수 있다. 전략적 선택이 없는 지역 선거다. 88년 13대 총선 이후 지역할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경쟁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말뚝 선거가 된다. 경쟁이 없으면 썩게 마련이다. 싹쓸이를 하고도 호남에서 의원들에 대한 불만이 가장 컸던 이유다. 선거 때마다 공천 파동이 난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쫓아낸다. 자극적인 언어폭력이 ‘사이다’라고 박수를 받는다.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중도세력은 설 땅이 없어진다.

지금 다수당 현상은 인물에 따른 것이다. 한국의 정당이 늘 그랬다. 대통령 후보를 따라 생기고 없어졌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제도로 다수당을 보장해줄 필요가 있다. 중대선거구제나 정당명부제 같은 선거제도 개편이다. 득표율과 의석수의 비례원칙도 지켜진다. 합리적인 대화와 타협의 정치로 갈 가능성도 커진다.

더 나아가면 개헌을 하는 것이다. 시행 시기를 언제로 하건 다음 정부에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미 후보들이 약속한 것이기도 하다. TV토론을 보면 얼마나 답답한가. 소화를 못한 모습이 애처롭다. 그걸 한 사람이 모두 결정하고 있다. 최순실이 태블릿PC에 이리저리 고친 대로 나라가 움직였다는 걸 생각해 보라.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jink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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