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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청문회라는 서커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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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200여 년에 걸친 인사청문회 역사상 장관 등 고위 공직자 20여 명이 청문회 과정에서 탈락했는데, 자진 사퇴한 경우와 부결된 경우가 비슷한 수준이다. 인사청문회가 정쟁의 도구로 활용되는 사례는 드물었으나 클린턴 행정부 때는 공화당의 정치적 공세로 4명의 후보가 사퇴한 끝에 리노 법무장관이 임명 동의를 얻어낸 경우도 있었다. 부시 행정부 아래서도 볼턴 유엔대사 역시 민주당의 정치 공세에 시달렸다. 인사청문회가 정쟁의 도구로 쓰이기도 하고, 때로는 정치적 거래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지만 행정부에 대한 견제와 감시를 위한 인사청문회의 기능이 의심받고 있지는 않다. 인사청문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인 행정부와 의회, 나아가 권력 기관 상호 간의 견제와 균형 역할의 중요한 일부를 담당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사청문회는 고위 공직 후보자들의 능력과 도덕성을 검증하고 그 과정을 통해 국민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대통령을 견제하고 투명한 정치 과정을 확립하는 역할에 일조해야 한다. 이번에 치러졌던 국무위원 인사청문회는 이러한 점에서는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대신 이번 청문회는 정치의 본질적 기능 중 한 가지를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정치는 무대가 있고, 관중이 있고 벌여진 판 위에서 뛰어다니는 광대가 있는 서커스와 매우 유사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국민에게 정치는 어떻게 보면 특정의 장에서 치고받는 배우들을 보는 구경거리이기도 하고 오락이기도 하다. 정치인들은 정치라는 경기장에서 국민에게 퍼포먼스를 보여 주고 이를 바탕으로 평가받는다. 이번 인사청문회에서 질의를 주고받는 의원들과 후보자들의 행태는 서커스적인 퍼포먼스가 두드러졌다.

청문회 과정을 통해 의원들은 과거의 행적과 발언을 근거로 법적.도덕적 문제를 낱낱이 들춰내면서 임명 후보자들을 난도질했다. 추궁의 대상이 된 후보자들은 조신하고 겸손한 태도로 의혹을 해명하고 나아가 지난날의 행적을 반성한다고까지 했다.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인지 일부 후보자는 평소와는 다른 옷매무새에 화장까지 하고 나왔다고 한다. 불과 몇 시간에 걸쳐, 질의 시간이 넘으면 질문자의 마이크를 꺼 가면서까지 시간에 쫓기면서 갖은 의혹을 제기하고 때로는 무슨 말인지 모를 답변을 듣고 끝난 쇼다. 여당 의원들은 모조리 적격, 야당 의원은 모조리 부적격이라는 의견을 적은 경과 보고서를 낸 청문회 결과는 이 서커스의 백미다.

날을 세우고 질의에 나선 야당 의원들은 정작 책임 부서의 수장으로서 필요한 정책적 비전과 임무 수행 능력에 대한 질의와 검증은 관심에 없어 보였다. 통일.복지.노동.과학기술 등 장차 우리의 국가적 생존과 번영을 위해 핵심적인 사안들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지는 의원들에게도, 장관 내정자들에게도 부각되지 않은 청문회였다. 본질을 외면한 채 재미도 없는 서커스를 자꾸 보라고 강요하는 정치를 좋아할 국민은 아무도 없다.

정하용 경희대 교수·국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