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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금녀의 벽 허문 그녀, 50년 만에 다시 완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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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1967년 당시 레이스를 제지당한 스위처(왼쪽)가 지난 18일 50년 만에 완주했다. [보스턴 AP=뉴시스]

1967년 당시 레이스를 제지당한 스위처(왼쪽)가 지난 18일 50년 만에 완주했다. [보스턴 AP=뉴시스]

50년 만의 마라톤 레이스.

보스턴 레이스 재현한 70세 스위처 #20세 첫 도전 때 온갖 방해 받으며 #끝까지 달렸지만 기록 인정 안 해 #5년 뒤 보스턴 여성 허용 이끌어 #조직위, 261 등번호 영구결번 처리

그는 똑같은 코스에서, 똑같은 번호를 달고 뛰었다. 그러나 분위기는 크게 달랐다. 올해 70세의 이 여성 마라토너는 42.195㎞의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 뒤 “흥분을 감출 길이 없다”고 말했다.

121년 역사를 자랑하는 보스턴 마라톤에서 올해 가장 큰 화제를 모은 참가자는 미국의 여성작가 캐슬린 스위처(70)였다. 그는 18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열린 제121회 보스턴 마라톤에서 4시간44분31초의 기록으로 골인했다. 1967년 4월 19일 열렸던 제71회 대회에 여성으론 처음 출전했던 그는 “매우 환상적이고 뜻깊은 일이다. 이런 기회를 준 보스턴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스위처는 전문 마라토너는 아니지만 세계 여성 마라톤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1967년 4월, 당시엔 남자들 만이 달릴 수 있는 보스턴 마라톤에 출전했다. 그는 성별을 구분하기 어려운 K.V.스위처라는 이름으로 참가신청을 했고, 자신을 지도한 코치들의 보호를 받으며 대회에 나섰다. 당시만 해도 육상계는 ‘다리가 굵어지고, 자궁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이유로 여성의 마라톤 출전을 금지할 때였다.

그러나 스위처는 굴복하지 않았다. “여성성을 마음껏 드러내겠다”며 보스턴 마라톤 출전을 감행했다. 레이스 도중 적잖은 어려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가 뛰고 있단 사실이 알려지자 한 대회 관계자는 레이스를 펼치던 스위처에 달려가 “번호표를 내놓고 당장 레이스에서 꺼지라”는 말과 함께 목덜미를 낚아채고 등에 단 번호를 찢으려 했다. 4시간20분만에 결승선을 통과했지만 대회 조직위는 기록을 인정하지 않았다.

스위처의 희생은 ‘여성의 달릴 자유’를 공론화하는 계기가 됐다. 마라톤 주자에게 달려드는 대회 관계자와 이를 피해 달리는 스위처를 찍은 사진은 당장 큰 논란을 일으켰다. 결국 4년 뒤인 1971년 뉴욕마라톤은 세계 최초로 여성의 참가를 허용했다. 보스턴 마라톤도 결국 1972년 ‘금녀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 이후 1984년엔 여자 마라톤이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스위처는 1970년부터 8년간 보스턴 마라톤에 참가했다. 끊임없는 노력 끝에 75년 대회 땐 기록을 2시간51분37초까지 단축했다. 스위처는 “운동 신경은 뛰어나지 않지만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피나게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의 도전은 다큐멘터리 영화·책으로도 소개됐고, 2011년엔 미국 여성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다.

18일 열린 50년 만의 레이스에서 스위처는 67년 당시 달았던 번호 261번을 그대로 달고 뛰었다. 배번과 코스는 그대로였지만 20세의 꽃다운 아가씨였던 스위처는 어느덧 70세의 할머니가 돼 있었다. 당시엔 홀로 도전해야만 했지만 이번엔 자신과 뜻을 함께 하는 125명의 이웃들과 함께 뛰었다. 물론 그의 레이스를 방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50년 전 그의 출전을 막았던 보스턴 마라톤 조직위는 올해 대회가 끝난 뒤 스위처의 위대한 레이스를 기리기 위해 그의 번호를 영구결번 처리했다. 스위처는 “50년 전 일어났던 일은 내 인생과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바꿨다. 앞으로 다가올 50년엔 더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김지한 기자 kim.ji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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