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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국민이 보고 싶은 대선후보의 자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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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홍구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이홍구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이번 주말로 대통령선거 후보 등록이 마감되며 3주 후 5월 9일에 19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진다. 불과 한 달 반 전 악몽과 같았던 헌정 위기를 대통령 탄핵으로 벗어난 국민에게는 숨 가쁜 일정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상황의 심각성과 절차의 촉박함이 겹쳐진 국가 운영의 전환점에서 국민은 복잡한 정책이나 공약에 앞서 당면한 국가적 선택에 대한 후보들의 진솔한 입장을 듣고 싶어 한다.

역대 대통령 모두 예외 없이 #명확한 헌법 조문 무시해와 #후보는 총리의 각료 제청 등 #헌법조항 준수 입장과 함께 #헌법 고치기 일정도 밝혀야 #국가 안보는 꼭 필요한 덕목

탄핵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주공동체를 지켜 내는 데 우리가 성공했다면 그것은 헌법에 충실한 게 나라를 지켜 가는 가장 중요한 필수조건이라는 국민적 합의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번 대선에 나선 후보들은 ‘헌법을 확실히 준수할 것인가’ 국민에게 분명히 약속하는 것이 기본적 책무라고 하겠다.

헌법을 무시하거나 지키지 않겠다는 후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대한민국 헌정사에선 역대 대통령이 예외 없이 명확한 헌법 조문을 무시하는, 그리고 국회와 언론 나아가 전 국민이 집단 최면에 걸린 듯 그러한 불법을 지금까지 관행으로 치부하며 묵인해 온 잘못을 저질러 왔다. 이미 이 칼럼을 포함한 여러 곳에서 누차 지적한 헌법 제87조 ‘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는 조항은 대통령의 독점적 권한에 대한 견제와 보완책으로 국무회의가 지닌 국정 운영의 중심적 역할의 활성화를 제도적으로 보장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실제로 국무총리가 국무위원을, 즉 내각의 장관들을 제청했다는 보도를 들어본 기억이 없다.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헌법 87조를 반드시 지키겠으며, 그렇지 못하면 당연히 탄핵의 대상이 되겠다’ 아니면 ‘나는 헌법 87조를 무시해 온 오랜 관행을 그대로 따르겠다’고 분명하게 국민과 약속하는 용기는 대통령 후보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자질이 아니겠는가.

‘헌법 지키기’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헌법 고치기’란 과제다. 헌법은 살아 있는 공동체의 규범이지 화석화된 기념비가 아니다.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점을 비롯해 헌법 개정의 필요성은 꾸준히 지적돼 왔다. 그러나 역대 대통령과 정치지도자들은 각자의 편의에 따라 개헌을 계속 늦춰 오다가 지난해 4·13 총선에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국민적 항의에 직면하게 됐다. 국회의 개헌특위는 개헌안 준비에 상당한 진전을 보여 왔으나 빠듯한 대선 일정에 밀려 지금은 주춤한 상태다. 대선후보들은 무엇보다 먼저 각자가 따르겠다는 개헌의 주요 내용과 추진시간표를 확실히 국민에게 제시해야 할 것이다.

대통령 탄핵에 이어 극도로 짧은 기간에 치러지는 이번 대선에선 국가 안보가 결정적 단일 과제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난달 칼럼에서 지적한 바 있다. 전쟁의 먹구름이 밀려드는 작금의 한반도 정세를 감안하면 국가 안보는 여타 이슈에 앞서 국가 생존을 좌우하는 절대요건임이 자명하기에 지난 며칠 여러 후보가 안보 중심으로 선거전략을 조정한 것은 다행스러운 행보라고 하겠다. 급하면 바른길을 택하는 우리 국민의 생존 본능이 작동한 결과라고 할까. 다만 상황이 급하고 어려울수록 눈앞의 손익에만 몰두하지 말고 역사의 큰 흐름에 맞춰 나라의 먼 앞길을 선택하는 지혜와 여유가 대통령에게 꼭 필요한 덕목임을 후보들과 국민은 함께 유의해야 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제국주의와 전체주의 시대의 종말로 시작된 미국 주도의 국제주의와 세계화 시대가 21세기로 들어오면서 점차 그 활력이 쇠퇴하는 징조가 짙어져 온 것은 사실이다. 세계화가 가져온 고도성장의 부작용과 반작용, 특히 갈수록 벌어진 국가 간, 계층 간의 빈부 격차와 종교 및 문화적 갈등이 뒤섞인 테러리즘의 확산은 세계를 불안의 수렁으로 끌고 왔다. 이런 와중에 동력을 되찾은 내셔널리즘은 강대국들을 ‘제국으로의 향수’로 유인해 새로운 힘의 경쟁 시대로 이어 가고 있는 것이 지구촌의 현실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 관계, 특히 오늘의 미·중 관계가 바로 그러한 흐름의 대표적 사례라고 하겠다.

100년 전 주권을 침탈당하는 민족사의 위기에서 안중근 의사가 내세운, 그리고 3·1 독립선언서가 민중의 뜻으로 천명한 목표는 독립과 동양평화가 함께 가는,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 권리가 보장되는 미래 건설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우리가 추구하는 국가적 목표로서 국제주의와 국제 협력을 지향하며, 자유와 인권을 위협하는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의 부활을 예방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러한 한류 민주주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동맹이나 동반자가 필요한지를 국민적 참여로 재확인하는 데 이번 대선의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