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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한국 여성은 길 가기가 두렵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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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윤재영사회2부 기자

윤재영사회2부 기자

건널목을 건너던 여성이 마주 걷던 남성의 팔꿈치에 얼굴을 맞았다. 여성은 남성의 등을 치며 항의했다. ‘욱’한 남성은 돌진해 여성을 넘어뜨린 뒤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다. 코뼈가 부러졌고, 얼굴은 피투성이가 됐다. 지난 8일 서울 송파구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하루 전인 7일 서울 관악구 낙성대역 주변에서 젊은 여성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역에서 나오던 여성은 난데없이 뒤에서 나타난 남성에게 머리를 맞았다. 시민들 도움으로 경찰에 체포된 남성은 “나를 비웃는 것 같아 때렸다”고 말했다.

또 있다. 지난 4일 서울 시내 한 대학에서는 여학생들을 향해 아무 이유 없이 콜라를 뿌린 남학생이 경찰에 붙잡혔다. “여자가 공부는 안 하고 밖을 돌아다니는 것이 기분 나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학교 게시판에는 “콜라가 아니라 염산이었으면 어찌할 뻔했나.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등의 성토가 이어졌다.

[일러스트=박용석]

[일러스트=박용석]

모두 최근 연이어 벌어진 일이다. 여성들은 “뉴스를 보면 점점 길거리를 돌아다니기가 무서워진다”고 하소연하지만 경찰의 현실 인식은 그렇지가 않다. 피해자의 코뼈가 부러진 8일 송파구 사건에서 경찰은 “길 가다가 서로 시비가 붙었을 뿐”이라며 가해자를 입건한 뒤 그대로 돌려보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경찰 대응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묻지마 범죄는 ‘자신보다 만만한 사람을 고른다’는 심리에서 시작된다.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공격하는 반사회적 동기에서 출발한 범죄는 이유를 막론하고 엄중히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혐오 범죄에 대해 일찍이 경각심을 가졌던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우리의 대응 태도는 무디고 더디다. 지난해 말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성별·인종·종교 등에 의한 혐오 범죄를 따로 관리하는 ‘증오범죄통계법’을 발의했지만, 종교계를 중심으로 ‘동성애 조장법’이라는 반발이 빗발치자 철회했다. 최근 강효상 자유한국당 의원은 여성 혐오 범죄 처벌을 강화하는 형법 개정안을 발의하겠다는 입장을 냈지만 여성 성희롱만 대상으로 삼을 계획이다.

미국은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 여성에 대한 혐오 범죄까지 가중 처벌하는 ‘증오범죄예방법’, 혐오 범죄자를 따로 분류해 관리하는 ‘증오범죄통계법’이 있다. 실제로 지난 3월 미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 여성의 머리를 이유 없이 망치로 내려친 남성은 증오 범죄 혐의로 기소됐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난해 5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 혐오에 대한 얘기가 숱하게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바뀐 것은 없다. 여성이 사회적 약자로서 받는 피해가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재영 사회2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