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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의 것 복수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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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6호 34면

허무 시리즈

예전에 유행하던 우스운 이야기 중에 ‘허무 시리즈’라는 게 있었다. 이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우습긴 한데 어딘지 허무하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허무 우스개 중 지금도 내가 기억하는 이야기는 복수 이야기다.

김상득의 행복어사전

원래 이 복수 이야기에는 전사가 없다. 죽은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각각 길을 나서는 세 자식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부모를 죽인 악인은 무술의 고수다. 부모님이 악인의 손에 죽는 것을 본 세 명의 자식은 반드시 복수를 하기로 맹서하고 삼거리에서 헤어진다.

첫째는 검술을 연마했다. 황사가 불거나 미세먼지 농도가 높아도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1만 시간의 법칙.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칼집에서 칼을 한 뼘 정도 살짝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은 것 같은데 반경 열 걸음 안의 모든 생명체는 목숨을 잃었다. 이제 됐다. 복수의 준비가 끝났다. 첫째는 산을 내려갔다. 원수를 만나기 위해서는 원수가 사는 곳으로 가야 한다. 마을을 지나야 한다. 마을에는 철없는 어린아이들이 있다. 첫째는 검술 연마에만 몰두했으므로 용모가 지저분하고 행색이 남루했다. 마치 노숙자 같았다. 아이들이 놀렸다. 첫째는 무시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더 심하게 놀렸다. 첫째는 웃는 얼굴로 그러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런 모습이 아이들 눈에는 바보처럼 보였다. 아이들은 돌을 바보에게 던졌다. 첫째는 화가 났지만 참았다. 자칫 칼 잡은 손목에 스냅이라도 주면 무구한 아이들이 목숨을 잃을 것이다. 참자. 참아야 한다. 그렇게 참는 바보의 표정이 아이들을 좀더 과감하게 만들었다. 아이들 중에는 아기장수도 있었는지 자신의 머리통보다 더 큰 돌을 뽑아 첫째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 명중. 첫째는 돌에 맞아 죽었다. 원수는 만나보지도 못하고.

둘째는 양손잡이였다. 쌍칼을 썼다. 둘째도 고수의 경지에 이르자 복수를 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첫째의 실패 사례를 교훈으로 삼고 산을 내려오기 전 몸을 씻고 2시간에 걸쳐 정성껏 머리손질을 했다.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둘째는 쌍칼을 X자 모양으로 등에 찼다. 속담처럼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났다. 외나무다리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둘째가 원수를 향해 칼을 뽑았을 때 새 옷 때문인지 쌍칼이 한번에 뽑아지지 않고 약간의 시차가 발생했다. 기우뚱. 둘째는 균형을 잃고 다리에서 떨어졌다. 원수에게 공격도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막내는 칼을 사용하지 않았다. 막내의 필살기는 눈 찌르기. 검지와 중지를 단련했다. 처음에는 모래를 찔렀고 나중에는 나무를, 마지막엔 바위를 뚫었다. 둘째를 교훈 삼아 외나무다리가 아닌 평지에서 원수를 만났다. 원수는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나마 부끄러움은 아는 놈인가? 막내는 원수를 향해 필살기를 날렸다. 마치 울버린의 주먹에서 튀어나온 금속 클로 같은 검지와 중지가 삿갓을 뚫고 원수의 얼굴에 박혔다. 하하하. 원수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삿갓이 벗겨졌다. 원수는 양 미간이 너무 넓은 자여서 두 눈이 거의 양쪽 귀와 붙어있었다. 막내는 원수의 칼에 죽었다. 이런 결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복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야기가 허무한 것은 원래 복수가 허무하기 때문이다.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죄 없는 생명들도 해쳐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다. 복수는 천길 낭떠러지에 걸린 외나무다리 위에서 한 번에 쌍칼을 뽑는 일이다. 균형을, 밸런스를, 형평성을 지키기 어렵다. 무엇보다 복수의 눈은 맹목이라 대상이 누구인지 보지 못하고 보아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복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복수는 허무하다.

복수의 지연

『햄릿』은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뺏은 자에게 복수한 한 덴마크 왕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사실을 알고도 복수를 하지 않고 미루고 미루었던, 도저히 더 미룰 수 없는 순간까지 미루었던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인지 모른다.

사회는 개인에게 복수하지 않는다

“사회는 개인에게 복수하지 않는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은 유사한 범죄의 재발을 막기 위함이지, 사회가 피해자를 대신하여 가해자에게 복수하기 위함이 아니다.” -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 중 ●

김상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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