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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자의 하이브리드 스포츠] MVP와 후보 단일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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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브리드(hybrid). 잡종, 혼성물이라는 뜻입니다. 스포츠계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화제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섞어서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끔찍한 혼종'이 나오더라도 재밌게 읽어주시길.

김성한.

김성한.

1985년 프로야구는 '삼성 천하'였다. 삼성은 그해 전·후기리그 모두 1위를 차지하면서 한국시리즈 없이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당연히 최우수선수상(MVP)은 삼성 선수의 차지가 될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후보도 세 명이나 배출했다. 마운드엔 나란히 25승을 거둔 선발 쌍두마차 김시진과 김일융이 있었다. 타자 중에선 주전 포수로 홈런·타점 2관왕에 오른 이만수가 후보로 선정됐다.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수상의 영광은 김성한(해태)이 차지했다.

물론 김성한에게 MVP 자격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홈런 1위(22개), 타점 2위(75개), 타격 3위(0.333)에 올랐다. 하지만 '집안싸움'으로 표가 나뉘어진 게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하다. 기록사이트 스탯티즈가 매긴 WAR(대체선수 대비 승리기여)에서 김성한은 5.43을 기록해 이만수(6.56)에 뒤졌다. 투수 중에서는 김시진이 10.52로 가장 높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잘 한 선수가 많아 압도적인 우승을 차지한 팀에서 MVP가 나오지 못한 것이다.

2017년 프로배구에선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정규시즌 2위에 오른 문성민(현대캐피탈)이 챔피언 대한항공 선수들을 제치고 MVP를 차지한 것이다. 문성민은 유효표 29표 중 14표를 얻어 김학민(7표), 한선수(5표), 가스파리니(2표)를 제쳤다. 1표는 삼성화재 타이스가 얻었다. 대한항공 선수들의 표를 합치면 문성민이 받은 14표와 동률이다. 프로배구는 MVP 후보를 특별히 선정하지 않기 때문에 대한항공 선수들의 표가 갈라졌다.

김학민은 MVP를 차지했던 2010-11시즌보다 공격성공률은 높았지만 정지석-곽승석-신영수와 출전시간을 나누느라 득점은 그 해보다 적었다. '분업'이 자리잡으면서 네 선수는 효율적으로 체력을 관리했고, 정규시즌 우승까지 차지했지만 기록상으론 문성민을 제치지 못한 것이다. 세터 한선수 역시 마찬가지다. 국내 No.1 세터다운 활약을 했지만 정규시즌에서 세터가 날개 공격수들을 제치긴 쉽지 않다. 가스파리니는 외국인선수라는 게 발목을 잡았다. 세 선수의 시너지효과는 우승이란 결과를 낳았지만 누구 한 명이 돋보이기 힘든 상황을 만들었다. 심지어 박기원 대한항공 감독도 "선수 어느 하나를 지목할 수 없다. 우리 선수들 모두가 거둔 결과"라고 말했다.

[포토]문성민,2년연속 MVP

[포토]문성민,2년연속 MVP

현대캐피탈은 챔피언결정전에서 대한항공을 물리치고 우승했다. 하지만 프로배구 MVP 투표는 정규시즌이 끝난 뒤 이뤄지기 때문에 챔피언결정전 결과는 반영되지 않는다. 순수하게 정규시즌 결과만으로 문성민이 수상한 셈이다. 남자부에서 2위 선수가 MVP를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문성민은 올 시즌 '가장 가치있는 선수(most valuable player)'로 불릴 만한 자격이 있다. 문성민은 외국인 선수 문제로 고민했던 현대캐피탈의 공격을 이끌었다. 현대캐피탈의 챔프전행과 정상 등극을 이끈 건 분명 문성민이었다.

과연 대한항공의 후보가 1명이었다면 MVP가 나왔을까. 2011년 프로야구 정규시즌 MVP를 생각해보면 그럴 것 같진 않다. 당시 통합우승을 차지한 삼성은 MVP 후보로 오승환과 최형우를 배출했다. 한국시리즈 MVP를 받은 오승환은 "후배 최형우를 위해 MVP 후보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프로야구 MVP 후보는 입후보제가 아니라 선발위원회에서 선출한 것이기에 사퇴는 불가능했다. 오히려 투표권을 가진 기자단의 반감을 사 투수 4관왕을 차지한 윤석민(KIA)에게 표가 쏠렸다. 사퇴로 인해 결과가 뒤집혔다고는 단언할 수 없지만 순리대로 진행하지 않은 '단일화' 탓에 삼성은 '게도 구럭도 다 잃은' 꼴이 됐다. 한국야구위원회는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 2016시즌부터는 MVP 투표를 점수제로 변경했다.

공교롭게도 대한민국은 '큰 투표'를 앞두고 있다. 제19대 대통령선거다. 언제나 그렇듯 이번 선거에서도 '후보 단일화'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6년 전 삼성에서의 사례에서 보여주듯 억지스런 단일화는 역효과를 나을 수 있다. 이번 대선에선 어떤 단일화가 이뤄지고, 어떤 결과가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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