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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사람 풍경] 배추 싹 보고 실직 아픔 씻어 … 농사는 도시인의 ‘에어포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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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도시농업 개척자, 안철환 온순환협동조합 이사장 

도시농부 안철환씨가 파종을 앞둔 밭의 흙 냄새를 맡고 있다. “정말 구수해요. 사람을 살리는 냄새죠. 이 맛에 농사를 짓습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도시농부 안철환씨가 파종을 앞둔 밭의 흙 냄새를 맡고 있다. “정말 구수해요. 사람을 살리는 냄새죠. 이 맛에 농사를 짓습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봄이다. 겨우내 움츠렸던 땅이 새 생명을 싹 틔울 태세다. 농부의 손발도 분주해졌다. 예부터 ‘봄에 하루 놀면 겨울에 열흘 굶는다’고 했다. 안철환(55) 온순환협동조합 이사장도 “마음이 바쁘다”고 했다. “3월부터 농사를 시작합니다. 밭에 심을 씨감자 준비를 마쳤어요. 거름도 충분하고요.”

목발 짚고 다니는 지체 2급 장애인 #IMF 때 출판사 나와 안산에 농장 차려 #“벼농사 쫄딱 망하고 고추 다 죽기도” #호미 하나로 일군 ‘행복 20년’ #똥·오줌·음식물도 거름으로 사용 #농부학교서 지금껏 6000명 가르쳐 #친환경 농업, 토종 씨앗 600종 모아 #“도시농부 크게 늘어 전국 200만 명 #흙 냄새 맡으면 우울증도 줄어들어”

안씨가 꾸려가는 경기도 과천시 관악산 자락 농부학교 실습장을 찾았다. 이를테면 농부 인턴학교다. 폭 1m, 길이 7m 크기의 틀밭(나무판자로 밭 테두리에 틀을 두른 밭)이 가지런히 펼쳐 있다. “이렇게 하면 흙이 유실되지 않아요. 땅을 갈 필요가 없어 거름도 적게 들지요. 실습을 마친 다음 농사를 짓거나 귀농을 하게 됩니다.”

안씨는 도시농부 개척자로 꼽힌다. 도시농부는 농촌 전업농과 대비되는 개념. 도시에 살며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다. 집안 텃밭을 일구거나 주말농장을 찾는, 즉 삭막한 콘크리트 빌딩숲에서 흙과 가까이 지내는 이들을 가리킨다.

경쟁에 대한 반발일까, 주말농장이 인기다.
“도시농부가 전국 200만 명쯤 된다. 3년 전엔 150만 명이었다. 증가 속도가 엄청나다. 2년 전 통계지만 도시농업을 돕는 지자체 조례가 74개나 있다. 지금은 더 생겼을 거다. 조례는 2009년 경기도 광명시에서 처음 생겼다. 2011년에는 도시농업지원법도 제정됐다. 도시의 삶이 위태롭다는 반증이다.”
조합명 온순환은 무슨 뜻인가.
“온전히 순환한다는 의미다. 요즘 말로 선순환이다. 친환경 농업을 지향한다. 토종 씨앗을 심고, 거름을 만들어 쓴다. 똥·오줌도 버리지 않는다. 음식물 퇴비통도 만들었다. 기존 농사는 화학비료로 키우는 고투입 농사다. 양분이 지나치면 땅이 병든다. 작물은 많이 나오지만 병충해가 심해진다. 농약을 뿌려야 한다. 악순환이다.”

저투입 농사를 하겠다는 말인가.
“저는 호미농법이라 부른다. 누구나 호미 한 자루만 있으면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우리 전통농법이 그랬다. 예전 충북 제천에 갔더니 할머니 한 분이 호미 하나로 1000평(약 3300㎡)을 일구더라. 지난해 7월 조합을 설립했다. 예비조합원 포함, 50여 회원이 있다. 매주 토요일 농부학교에 와서 공부를 한다.”
안씨가 고안한 친환경 뒷간. 밭에 뿌릴 거름으로 쓴다. 인분에 톱밥이나 왕겨를 1.5~2배 정도 넣고 발효시키면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다.

안씨가 고안한 친환경 뒷간.밭에뿌릴 거름으로 쓴다. 인분에 톱밥이나 왕겨를 1.5~2배 정도 넣고 발효시키면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다.

올 한 해도 바쁘겠다.
“가장 먼저 감자를 심는다. 보통 춘분(20일)에 심는데 올해엔 윤달이 들어 4월 1일에 심을 생각이다. 그 다음엔 상추·시금치·쑥갓·무·배추다. 곡우(4월 20일)가 지나면 벼·수수·고추를, 단오(5월 30일)가 지나면 들깨·메주콩·조를 심는다. 예전에는 40여 가지를 지었는데, 요즘은 힘이 달려 20~30가지밖에 못 한다.”
식비가 들지 않을 것 같은데.
“대략 80~90%는 자급하는 것 같다. 쌀농사도 지은 적이 있다. 돈을 쓸 일이 별로 없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술 먹는 것을 좋아해 술값 정도 들어간다. 대리운전비가 적지 않게 나오지만….”(웃음)

안씨는 서울 출신이다. 농부와 거리가 멀었다. 출판사 기획자로 일하던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로 회사를 나와야 했다. 98년 경기도 군포 수리산에서 친구와 낮술을 먹다 주말농장 푯말을 봤다. “야, 우리 농사나 지을까.” 땅 세 평(10㎡)을 빌렸다. 어머니에게 배추씨를 받아다 심었다. 배추는 사흘 만에 싹을 틔웠다. “신내림과 같았다. 배추 싹에 홀딱 반했다. ‘저 씨 안에 무엇이 있구나’. 그 뒤로 매일 밭에 나갔다. 아내가 ‘저 인간, 드디어 맛이 갔구나’라고 할 정도였다. IMF로 인생 2모작을 일군 셈이다.”

안씨가 고안한 친환경 음식물 퇴비통. 밭에 뿌릴 거름으로 쓴다. 인분에 톱밥이나 왕겨를 1.5~2배 정도 넣고 발효시키면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다.

안씨가 고안한 친환경 음식물 퇴비통.밭에뿌릴 거름으로 쓴다. 인분에 톱밥이나 왕겨를 1.5~2배 정도 넣고 발효시키면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다.

흙을 만진 지 어느덧 20년째다.
“세 평으론 성에 차지 않았다. 이듬해 친구들과 함께 800평(2640㎡)을 얻었다. 그때가 가장 재미있었다. 일주일 내내 밭에서 살았다. 밭에서 해 뜨는 것을 본 적이 있나, 정말 장관이다. 2000년 경기도 안산에 400평(1320㎡)을 구해 농장을 차렸다. 바람들이 농장이다. 아파트 사려고 모은 돈을 털었다.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몸이 불편하지 않나.
“돌 무렵 소아마비에 걸렸다.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하는 지체 2급 장애인이다. 휠체어 신세도 진다. 하지만 농사에는 장애가 없다. 밭에 기어 다니며 풀을 매고, 돌도 골랐다. 내 몸에 맞는 리어카를 만들어 끌고 다녔다. 사각형 고무통에 바퀴를 달았다. 힘들지만 즐거웠다. 지금은 1급 프로 농부가 됐다.”
농사도 기술이다. 어떻게 배웠나.
“예전에 출판사 다닐 때 귀농운동본부와 인연을 맺었다. 덕분에 농사를 하며 귀농본부 계간지를 만들게 됐다. 전국의 유기농 고수들을 인터뷰했다. 어마어마하게 쫓아다녔다. 전설적 대가들을 다 만난 것 같다. 그렇게 4년을 정신없이 지냈다.”

실패한 경우도 많았겠다.
“농사는 거짓말을 안 한다지만 실패와 성공의 연속이었다. 자꾸 새로운 걸 시도하다 보니 낭패를 본 적이 많다. 벼농사를 짓다가 쫄딱 망한 적도 있다. 고추농사는 3년 만에 결실을 거뒀다. 저는 몸이 불편해 모종을 하지 않는다. 씨를 바로 뿌리는 직파법을 쓴다. 고추는 싹이 나는 데 3주가 걸리는데, 그 중간에 풀을 매주지 않아 고추씨가 다 죽어 버렸다.”
도시농부에 눈을 돌린 계기는.
“2004년 귀농본부 요청으로 안산 농장에 예비귀농자 실습학교를 열었다. 이듬해 제1기 도시농부학교를 개설했다. 농촌보다 도시에 농사가 더 절실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수요도 컸다. 당시 제가 번역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에 나오는 도시농업에서 힌트를 얻었다.”
강연 활동도 눈에 띄던데.
“책 덕분이다. 그간의 경험을 엮어 『내 손으로 가꾸는 유기농 텃밭』 『호미 한 자루 농법』 등을 냈다. 이름이 알려지니 연평균 70~80차례 강연 요청이 들어온다. 여기저기 농부학교도 방문한다. 그간 거쳐 간 도시농부가 얼추 6000명은 되는 것 같다.”
왜 도시농부인가.
“땅의 생명력을 맛보자는 거다. 농사는 몰입이다. 흙 냄새를 맡으면 우울증도 줄어든다. 농사는 도시인의 에어포켓과 같다. 베란다·옥상·앞마당 등에서 쓰는 텃밭상자도 개발했다. 인기가 대단했다. 요즘에는 생태농업에 관심이 크다. 올해 과천 남태령 인근에 1500평(4960㎡)을 빌려 본격 실험에 나선다. 자급 수준을 넘어 판매도 계획하고 있다.”
안철환씨가 모은 토종 씨앗들.

안철환씨가 모은 토종 씨앗들.

토종 씨앗을 고집하는 이유라면.
“지금까지 600여 종을 모았다. 주변에도 나눠 준다. 우리는 상업농이 아니다. 대량생산을 하지 않는다. 단일품종 씨앗을 사다가 짓는 단작을 거부한다. 여러 종을 섞고 돌려 심는 혼작·윤작을 한다. 그래야 땅이 건강해진다. 농부가 씨를 받지 않으면 그 작물은 사라진다. 그러면 지구도 사라지는 것 아닐까.”
모든 이가 그렇게 할 순 없다.
“제 방식을 강요하지 않는다. 농사에는 왕도가 없다. 각자 자기에게 맞는 방법이 있다. 솔직히 호미농법을 장애인농법이라고 부른다. 제 몸이 힘들다 보니 터득한 방법이다. 그 과정에서 땅을 새로 알게 됐고, 도시농업 전도사도 됐다. 이만하면 행복하지 아니한가.”
고령화 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나.
“도시농업도 언젠가 한계에 부딪힐 것이다. 주말농장도 요즘 정체된 상태다. 하지만 국민의 30%는 크든 작든 농사를 지었으면 한다. 농사는 사회를 떠받치는 안전망이 될 수 있다. 나이가 들어도, 실직을 해도 굶어 죽는 일은 없을 테니까.(웃음) 농토는 자기만의 소왕국이다. 그만한 충족감·성취감을 또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S BOX] 베란다·옥상도 훌륭한 텃밭

농사는 생각보다 어렵다. 초보라면 더욱 그렇다. 안철환 온순환협동조합 이사장으로부터 도시농부의 ABC를 들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역시 상자텃밭이다. 요즘에는 배양토도 나온다. 적당한 플라스틱 화분을 구해 배양토를 넣은 다음 모종을 꽂으면 된다. 요즘 시판되는 배양토에는 웬만한 거름이 다 들어가 있다.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다. 신경 쓸 일이 많다. 흔히 아파트 베란다에서 키우는데 햇빛이 모자라 식물이 웃자랄 수 있다. 정남향이라도 그렇다. 베란다 동·서쪽 벽면에 알루미늄 포일이나 은박지 돗자리를 붙여서 모자라는 햇빛을 보충한다. 통풍도 중요하다. 베란다 반대편 창문도 열어 맞바람이 불게 한다. 그게 요령이다. 옥상에서 키우는 것 또한 만만하지 않다. 수분이 쉽게 날아가기 때문에 여름철에는 서너 번 물을 줘야 한다. 아니면 말라 죽을 수 있다. 물 대책이 필요하다. 페트병 바닥에 작은 구멍을 내고 링거처럼 거꾸로 꽂아두면 편리하다.

그런데 작물을 맛있게 먹으려면 진짜 흙 맛을 봐야 한다. 배양토에 자연흙을 30%가량 섞으면 좋다. 자연흙에는 미네랄이 풍부하다. 인공토양으로 고구마를 키워본 적이 있는데 맛이 하나도 없었다. 무보다 심심했다. 식물이나 동물이나 똑같다. 천적과 싸워 보고, 바람을 쐬고, 흙 냄새를 맡아야 제맛이 난다. 숨막히는 닭장에서 사육하는 닭과 방목해 키우는 닭이 같을 수 있겠는가. 베란다·옥상에 만족하지 말고 시원한 자연으로 나오시기를….

글=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jhlogos@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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