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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소설가 강석경씨 기고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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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13일 막을 올린 '2003 경주 세계문화엑스포'의 개막 공연 '천마의 꿈'은 천마의 힘찬 발굽소리를 연상케하는 다듬이 소리와 화려한 춤사위를 통해 새 천년의 꿈을 열어가는 의지를 보여줬다.

이 총체극은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 자문과 각본을 맡고 표재순씨가 연출한 것으로 디딤무용단.중앙대 무용과.동국국악예술단. 경주여자정보고 학생 등 81명이 출연했다. 소설가 강석경씨가 개막 공연 하루 전 리허설을 보고난 후 가슴 울렁이는 사연을 담았다.

벌써 오래 전 국악인 황병기 선생과 인터뷰를 한 일이 있는데 유달리 정적을 좋아했던 부친을 회상하며 들려준 말이 지금도 기억난다. "정적을 좋아하는 것과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통한다"고.

***한국 정서의 근원적 소리

음악가의 말대로라면 소리가 시끄러워 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버스나 택시에서 라디오 소리가 울리면 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나같은 사람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틀림없다. 내가 여행한 20여개국 중에서 유일하게 노래를 무차별적으로 틀어놓는 인도와 한국을 후진국으로 분류할 만큼 소리에 대해 까탈스럽지만 좋은 소리 앞에선 그만큼 더 감동할 줄도 아니까.

내가 생각하는 좋은 소리는 바람에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강물이 돌밭을 적시는 소리, 초가을 밤의 풀벌레 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며 근원적인 소리다. 산사에 울리는 목탁 소리도 발길을 멈추게 만들고, 경주에 처음 와서 동네를 산보할 때 담너머로 들려오던 다듬이 소리는 향수를 자아냈다. 감기는 듯한 맑은 마찰음이 다듬이돌 앞에서 이불 호청을 다지던 젊은 어머니 모습을 떠올리게 했는데 그리움인지 회한인지 모르겠다. 내 유년기에 어느 집에서든 들을 수 있었던 다듬이 소리는 한국인의 정서에 뿌리내린 근원적인 소리가 아닐까.

경주문화 엑스포 개막 공연 '천마의 꿈-원화와 화랑이 만날 때'무대에서 수십 대의 다듬이소리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무대엔 다섯 색깔의 천이 놓인 다듬이가 부채살처럼 놓여있어 마주 앉은 무용수들이 방망이로 두들기며 오케스트라처럼 합주했다. 무대 한가운데 높은 단 위에 앉은 한 원화가 다듬이질을 시작하면서 황색.청색.적색 줄의 원화들이 앞에서 뒤에서 높고 낮게 방망이로 장단을 맞추는데 동에서 남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밀물.썰물처럼 다듬이 소리가 무대에서 물결쳤다.

***恨 아닌 조화.생성의 화음

다듬이는 말 그대로 천을 다듬는 도구다. 한국 전통옷은 동전과 말기를 뜯고 해체해 빨고 다듬어 다시 짓는데 여인네들은 이 과정에서 삶의 고달픔을 방망이에 실어 원망과 슬픔까지 다들이질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천마의 소리'는 다듬이 소리로 한국 여인들의 한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조화와 생성의 화음을 제시했다. 무대에 조각처럼 서있던 십이지신상들이 탈을 벗고 앞으로 나와 화랑도를 추는 장면은 침묵하던 천년의 돌에서 화랑정신을 불러낸 것이리라. 남자들의 손에서 전투도구가 되는 방망이를 여인들은 화합의 도구로 두드리며 옷을 새로 짓듯이 마음을 다듬고 갈등을 삭이고 정화시켜 찬란한 색채의 꽃을 피워낸다. 다듬이에서 하늘을 향해 깃발처럼 올라가는 오색천들이 그 결실이다. 이 생성의 제의 앞에서 천마는 21세기를 향해 비상한다.

***새로운 한국적 '여성성' 발견

이 극은 개막식 행사에 맞춰 9분이란 짧은 시간 동안 공연된 퍼포먼스이다. 원래의 구성보다 압축하여 아쉬움이 있었지만 음악으로 만들어진 다듬이 소리가 환상적이었고 한국 최초의 시도여서 의미를 주고 싶다.

작곡가 최종실 교수는 처음엔 다듬이 소리로 작곡하기가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34개의 다듬이를 다섯줄로 구성해 무용수들이 장단을 주고받고 치며 화음을 이루도록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단조로운 다듬이 소리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표재순 감독은 한국소리의 새로운 발견이라면서 다듬이 소리의 '여성성'을 주목한다.

사진=조문규 기자 <chom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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