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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가 해보다 붉은 그곳, 생명의 땅 DMZ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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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사진계에서 드문 1년 장기 전시회를 파주 임진각 내 DMZ 생태관광지원센터에서 열고 있는 김녕만 사진 작가는 “오기 힘든 곳이라 걱정했는데 의외로 관람객이 많아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사진 김녕만]

사진계에서 드문 1년 장기 전시회를 파주 임진각 내 DMZ 생태관광지원센터에서 열고 있는 김녕만 사진작가는 “오기 힘든 곳이라 걱정했는데 의외로 관람객이 많아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사진 김녕만]

임진강 주변 철조망을 타고 오른 능소화가 해보다 붉다. 강화도 민간인 통제선 안 숲속에서 고라니의 티 없는 눈망울이 카메라를 응시한다. 사진작가 김녕만(68)씨가 찍은 비무장지대(DMZ) 식물과 생물은 사람 발길 멈추고 손길 타지 않은 64년 동안 자연의 힘으로 분단의 아픔을 이겨냈다. 파주 임진각 내 DMZ 생태관광지원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김녕만 사진전-생명의 땅 DMZ’는 지난해 9월 22일 개막한 뒤 반년 동안 수천 명 관람객에게 위안을 주었다. 1년이란 긴 기간을 잡아 기획된 전시는 가을에 시작해 겨울을 지나 새봄을 맞으며 막 반환점을 돌았다. 시절마다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52점 사진은 우리 국토의 허파 노릇을 하는 이 땅 곳곳을 보여준다.

김녕만씨 파주 임진각서 사진전 #52점 추려 작년 9월부터 1년 전시 #“기록서 기억으로 흘러드는 사진 #막걸리처럼 시원한 작품 하고파”

“판문점 출입기자로 일하던 1980년대 초부터 이웃집 드나들 듯 수시로 DMZ의 모든 것을 기록했어요. 처음에는 팽팽한 남북 대치 상황만 보이더니 이제는 그 긴장을 넘어선 자연 본래 모습이 가슴에 와 닿아요. 인간의 폭력이 떠난 자리를 복원하고 있는 생명체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사진을 찍고 있죠.”

일간지 사진기자를 지낸 김씨는 현장에서 일할 때 보던 비장한 비무장지대보다 요즘 밖에서 보는 DMZ가 더 좋더라고 했다. 안에서 못 보던 세월의 때깔이 눈부셔서 셔터를 누르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30여 년 전에는 직업으로서의 사진 찍기인 탓에 숨 가쁘게 돌아치느라 어깨에 힘이 들어갔는데, 이제는 세월의 결을 살피며 한 컷 한 컷 느리고 부드럽게 셔터를 누르니 고향 길을 걷는 듯 여유롭다.

임진강 주변 철조망을 타고 핀 능소화를 담은 김 작가의 사진. 남북 자연은 이미 하나다. [사진 김녕만]

임진강 주변 철조망을 타고 핀 능소화를 담은 김 작가의 사진. 남북 자연은 이미 하나다. [사진 김녕만]

“기록에서 기억으로 흘러드는 기분으로 사진을 즐깁니다. 빈속에 목으로 넘어가는 막걸리처럼 시원하고 후련한 사진, 뒤끝이 해학으로 넘치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분단과 환경을 아우른 그의 사진전은 국내외에서 찾아오는 관광객에게 특별한 체험의 공간이 되고 있다. 『판문점』 『시대의 기억』 등 그가 펴낸 사진집과 ‘분단의 현장에서 희망을 읽다’ 등 10여 회 전시회에서 보여줬던 일관된 정신이 제 공간을 만나 힘을 쏟아내고 있다. 전시를 기획한 이기명 ‘사진예술’ 대표는 “김녕만의 사진을 통해 DMZ의 하늘과 땅과 물길 속에서 소중한 생명을 이어가는 자연을 본다”고 설명했다. 남북이 서로에게 퍼부은 무기의 상처, 적대감의 골이 너무 깊어서 치유 불능과 불임의 땅이 된 줄 알았던 DMZ는 7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의 손길이 덮어주니 더 아름다워졌다.

“남북 대치의 긴장은 더 깊어졌는데 자연의 복원력은 사람 힘을 뛰어넘어요. 서식하는 동식물이 주인인 희귀 낙원이죠. 언젠가 통일이 되면 역사의 한 부분으로서 비무장지대의 기록이 필요하겠죠. 그때 제 사진이 작은 역할이라도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시대의 기억과 통찰을 불러오는 사진.”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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