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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 시인|어린시절의 삶을 실체로 모형화|이창기의『어린 해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이창기 씨의 『어린 해탈』(세계의 문학·가을호)은 우리들 인간의 어린 시절이 삶의 단순한 펀린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하나의 실체임을 모형화해 보여주는 드문 예에 속한다. 7연 53행이란 짧지 않은 길이와 서사적 구조를 바닥에 깔고 있는 이 작품은 외견상 개인적이고 페쇄적 정황들로 가득 차 보인다.
그러나 다시 천천히 읽어보면 암시적인 제목이 말해주 듯, 해안도시에서 자란 어린시절의 체험을 구조화하고 실체화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의 시적 서술속에 묶여 있음을 알수있다.
적십자병원에서 만난 한 기집애의 이름을 몰래 불러보는 일을 포기하기까지에 이르는 동안, 그속에서 <더듬거리며 초목처럼 푸르러지는 목소리와 그 취기>가 우리들의 사랑 어디엔가 있음을 발견하며 (1연), 수문통시강밑의<녹개된 개천속은 허심탄회하여 모든 부패를 감싸고>,그것과는 달리 <겁에 질려 첨벙대고 엎어지며 달려나오는>세상을 본다 (2연).
개흙밭과 미군부대 철조망과 미친여자 사이를 오가며 보낸 그 시간이란 결국<집은 단지 가까이 있을 뿐 따뜻하지>않았기 때문이며 (3연), 아이들끼리 살자고 맹세한 동굴도 이미 어른들에 의해 점령당한 곳 이었으며 그 물증으로<한 무더기의 똥과 빨간 팬티, 벌거벗은 낙서들>을 발견한다 (4연). 그와같은 방황 속에 김집에 꽂혀있던 부고라는< 지상에서 보낸 마지막 편지>즉 죽음의 한 형식을 알고 (5연)<빈 짐과 어쩌면 심심해서 미쳐버렸을 지도 모르는 착한개의 앞날>이 바로 버려진 우리들의 그것임을 확인한다(6연). 그리고 성장한 지금은 <물소리가 들리면 온몸이 아프다>고 고백한다(7연).
어째서 물소리가 들리면 온몸이 아픈가. 이 질문은 물소리가 들리는 때와 물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라는 두대립항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물소리는<가신의 목을 비틀고 그러다 졸음이 오고>하는 순간에 들린다. 함께 발표하고 있는 다른 작품의 시귀를 인용해서 말하자면 <가출하고 서명하고 위로하고 제대했다 토하고 출근하고 뺨맞고 울고 빌며 때맞추어 박수치고 아우성치며(어느 형식주의자의 고백)>사는 순간이 지난 뒤에 들리는 소리다.
그러니까 형식적 삶의 소음이 가라앉은 후에라야 들리는 깊은 곳의 울림이다. 그가 아픈 것은 비로소 듣는 그 깊은 소리의 충격 때문이다. 그의 시는 그러니까 물소리 또는<더듬거리며 초목처럼 푸르러지는>그 깊은 목소리의 다른 이름이다. 보라, 그는<숨소리를 들을때 나의 기쁨은 또 얼마나 즐겁겠냐 철천지 행복아 (내가 뭐 자연이니)>라고 부르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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