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의 분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톨스토이」의 명작『전쟁과 평화』에 맑게 갠 가을 하늘을 극적으로 묘사한 대목이 나온다.
1805년 나폴레옹전쟁때 러시아의 귀족청년「안드레이」는 전장에서 중상을 입고 쓰러진다. 얼마만에 의식을 되찾아 눈을 떠보니 가을하늘이 창창(창창)하게 열려 있었다.
10월 시베리아 벌판에서보는 하늘도 요즘의 우리나라 하늘만큼 새파랗던 모양이다.『아! 이 얼마나 조용하고 장엄하냐! 나는 왜 이제까지 이를 깨닫지 못했을까. 아니다. 지금 깨달은 것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그렇지. 이 하늘 이외에는 모두거것이다.』
「안드레이」 청년은 이렇게 독백했다. 그의 감동은 얼마나 깊었던지, 그때 전지를 시찰나온 승승강구의 「나폴레옹」장군도 참으로 하찮은 인간으로 보였다.「안드레이」는 결국 눈을 감고 말지만 푸른 하늘을 깨달은것 만으로도 행복했다.
『사람들은 살아갈 궁리만 하고있을 때는 고상한 생각을 하기어렵다.』
「장-자크·루소」의『참회록』에 있는 얘기다. 정말 그런것 같다.
우리는 조용히 고상한 생각 한번 해볼 겨를도 없이 살아왔다. 몇년, 몇달을 두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쳤지만 그 보답은 최루탄과 고통뿐이었다.
또 몇십년, 몇해를 두고 『잘 살아보자』는 구호는 밤낮없이 일손만 내려다 보게했다. 꽃이 피는지, 낙엽이 지는지, 하늘이 푸른지, 계절감각도 없이 나날을 숨이 차게 살았다.
사람들은 꽃놀이, 단풍놀이를 다녀도 파도에 좇기듯 밀려다닐뿐 답답하고 번거로운 마음은 어디에서도 열리는것 같지 않았다.
우리 삶의 상황은 어떻게 보면 사삭같은 것은 경멸해버린 나머지, 조용히 자기를 되돌아보는 감수성도, 사물을 분별하는 감수성도 모두 상실해버린것은 아니었을까.
올가을은 유난히 하늘이 맑고 기온마저 쾌적해 정신 또한 번쩍 드는것 같다. 이 좋은 가을날에 정치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이땅의 일들에 공연히 분심이 들어 저푸른 하늘이 아깝기만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