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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갈라놓은 게 부정부패보다 더 큰 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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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호 04면

나라 두 동강 걱정, 광장의 또 다른 목소리

4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탄핵 반대 태극기집회(사진 위)와 탄핵 찬성 촛불집회. 헌재 결정이 임박해 단상 위의 연설은 이전보다 과격해졌지만 시민들은 갈라진 나라를 걱정했다. 김성룡 기자

4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탄핵 반대 태극기집회(사진 위)와 탄핵 찬성 촛불집회. 헌재 결정이 임박해 단상 위의 연설은 이전보다 과격해졌지만 시민들은 갈라진 나라를 걱정했다. 김성룡 기자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이 임박한 4일 서울 도심은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의 마지막 총력전으로 시끄러웠다. 양측은 마주 달리는 기차처럼 격렬한 목소리로 ‘탄핵 인용’과 ‘탄핵 불가’를 외쳤다. 확성기로 울려 퍼진 “멸공의 횃불 아래 목숨을 건다”는 태극기집회 측 군가는 극단으로 맞서는 집회 분위기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줬다.

촛불·태극기 사이, 판문점 같아 #친목회·동창회 다 반쪽 만들어 #정치인들 얼굴에 권력욕 가득 #마이크 잡고 승복 못한다지만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아

헌법재판소가 이르면 10일께 탄핵심판 선고를 할 것으로 보여 이번 집회는 양측이 참가하는 마지막 주말집회가 될 가능성이 크다. 탄핵반대 단체는 “3·1절 집회에 500만 명이 모였고 이번엔 그보다 더 왔다”고 주장했다. 김진태 자유한국당 의원은 태극기를 두르고 연단에 올라 “고지가 멀지 않았다. 다음주 집회가 축제의 장이 될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힘을 내달라”고 광장의 참가자들에게 호소했다. 대통령 변호인단의 김평우 변호사는 “탄핵은 재판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에 불과하니 즉시 찢어 버려야 하고 법적으로 각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촛불집회에 참가한 이충재 한국YMCA 전국연맹 사무총장은 “부패 세력이 내란을 운운하고 테러를 조장하는 등 극단적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이들의 재집권을 위한 마지막 도발과 저항을 이겨내자”고 독려했다.

탄핵 마땅하나 기각돼도 받아들여야

양쪽 단상은 뜨거웠다. 태극기집회 연단 주위에서는 참가자가 태극기를 온몸에 두르고 호루라기를 불었다.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60대 여성 참가자는 “이정미(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남편이 통진당 고위급 당원이라 자신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서둘러 박 대통령을 탄핵하려 한다. 빨갱이들의 국가전복 음모”라고 말했다.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의 남편은 통진당원이 아니고 이 재판관은 통진당 해산심판 당시 해산이 정당하다는 의견을 냈다는 기자의 말에 “가짜 뉴스”라고 믿지 않았다. 그는 “태블릿PC 등 요즘 뉴스 상당수가 다 거짓이어서 믿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단상에서 멀리 있는 참가자들은 비교적 차분했다. 그들 중엔 갈라진 나라를 걱정하는 시민이 많았다.

경기도 이천에서 올라온 최정수(56)·박동분(61) 부부가 그랬다. 최씨는 “박 대통령이 잘못했지만 탄핵할 정도는 아니다. 누드화 같은 건 모욕이다. 추하지는 않게 내려 보내줘야 한다. 그래서 태극기집회에 나왔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나라가 두 동강 났다. 지금 친목회건 동창회건 다 반쪽이다. 부모· 자식끼리도 의견이 달라서 말도 안 하는 가정도 있다더라. 사람들이랑 대화하기 전에 너는 이쪽 색, 너는 저쪽 색, 이렇게 나누고 시작해야 될 판이다. 걱정이 된다. 어서 나라가 평안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부인 박씨는 “학생들도 공부 못 하고 거리로 나와 촛불 들고 있지 않느냐. 못난 꼴 보여주는 어른들이다. 어서 빨리 나라가 평안해져야 경기도 살아나지 않겠느냐”고 안타까워했다. 그러자 남편 최씨는 “정치적인 일인데 헌재가 땅땅 판결 내려서 어느 한쪽 편들어 주게 만드는 게 말이 되느냐. 헌재 결정이 나면 반대쪽에서는 어느 편 들어줬다고 난리가 날 거다. 정치적으로 각당에서 잘 해결해야지, 이렇게 질질 끌고 와서 사람들 고생시키고 나라 어렵게 만드는 게 뭔가”라며 혀를 찼다.

촛불집회에서 만난 양규종(59)씨는 “대통령이 큰 죄를 졌기 때문에 탄핵돼야 하지만 헌법재판소에서 기각하면 아쉽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 처음으로 태극기집회에 가봤다. 거기도 대한민국 국민이고 여기도 국민이다. 그런데 분위기는 너무나 달라 촛불집회장과 태극기집회장 중간이 판문점 같더라.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이 참담하다. 미국·중국·일본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국민이 안쓰럽고 치유가 금방 될 순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양씨는 “태극기 측도 목숨 걸고 투쟁하겠다고 그러고 여기도 그러니 이건 제대로 된 나라가 아니다”고 말했다.

집회장 주위의 상인들도 우려와 걱정이 컸다. 남대문 삼성프라자 앞 토스트 가판대를 운영하는 민병호(75)씨는 “헌재 결정이 끝나면 더 큰 폭풍이 찾아오지 않을까 겁난다”고 했다.

민씨는 지난주 겪은 일화도 얘기했다. “태극기집회 참가자로 보이는 여성 두 명이 토스트를 드셨다. 그러면서 ‘사장님은 어느 편이에요’라고 묻더라. ‘굳이 따지자면 촛불에 더 가깝다’고 하자, 손님들은 ‘여기서 다시 사 먹으면 안 되겠다’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민씨는 “가족 사이에서도 정치에 대한 의견이 다를 수 있는데, 뭐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하는가 싶었다. 다르면 다르구나 생각하면 되는 건데, 요즘엔 다르다고 하면 ‘넌 안 되겠구나’ 하는 게 안타깝다. 그걸 정치인들이 앞장서서 선동한다. 선택을 강요하게 한다. 집회에 나온 정치인들 보면 권력과 탐욕이 얼굴에 가득해 보인다”고 말했다. 22년간 주말도 없이 토스트를 구운 그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잘되는 정의로운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청역 인근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수희(59·가명·여)씨는 가게 앞에 태극기를 꽂아뒀다. “집회가 시작된 후 매출이 줄었고 시청역 바로 옆이라 태극기 손님이 많다. 손님들이 태극기인지 촛불인지 자꾸 물어 태극기를 달아놨다. 개인적으론 대통령 잘못이 커 탄핵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태극기 참가자들이 어느 편이냐고 물으면 그냥 손가락으로 태극기를 가리킨다”고 말했다.

빨리 수습해야 하는데 가능성 안 보여

김씨는 “태극기 측 얘기도 이해가 된다. 박 대통령의 죄는 인정하지만 그래도 탄핵까지 하는 게 맞느냐고 묻는 분이 많다. 또 신문·방송이 너무나 한쪽 얘기만 전해주더라. TV뉴스 보다보면 우리처럼 나이 든 사람들 다 바보고 죄인인 것처럼 취급할 때가 많다. 인터넷 댓글은 차마 보지도 못하겠다. 집에서 아이들하고 얘기가 안 통하니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는 서울광장에 나와서 위안을 얻는다며 오시는 분이 많다. 집에서 받은 응어리를 여기 와서 푸는 거다”고 했다.

김씨는 “가게에 오시는 분들 하는 얘기 중엔 총을 구하러 다녀야겠다는 극단적인 말도 들린다. 빨갱이 문재인하고 이재명을 쏴 죽이겠다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총을 구하러 다닌다는 분들은 극소수고 대부분은 대학 나오신 분들이고 나라 걱정에 후손 걱정에 나오셨다. 촛불도 대부분 나라 걱정하시는 분들이니 탄핵 결정 이후에는 서로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집회도 나가봤다고 한다. 김씨는 “마이크 잡고 소리 크게 지르는 사람들은 헌재 결정도 승복 못 하겠다고 하지만 그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이도 많다”고 했다. 김씨는 태극기집회 참가자를 비하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태극기집회 초기에는 돈을 받고 오시는 분이 많았다. 밥 먹으러 오는 기사들 얘기를 들어보면 5만원, 7만원 받아 간다는 분들 태우고 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요즘에는 그런 분들 없고 다들 자발적으로 오신 분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져서 태극기집회도 자발적인 형태로 변했다. 태극기집회도 국민들의 목소리”라고 말했다.

시청역 근처에서 꽃집을 운영하는 유광호(가명)씨는 “젊은 청년들이 얼마나 불쌍한가. 지금 한국에 대항해서 중국이 저렇게 난리인데 우리는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 정치가 하는 게 뭔가. 대통령 잘못 뽑아놔서 나라 전체가 고생한다. 정치가 아주 개판이다. 수습을 빨리 잘해야 할 텐데 가능성이 별로 안 보인다. 꽃 키우는 농장들도 안 되고, 배달하는 사람들도 일주일 동안 2건 배달했다고 하더라. 김영란법 영향도 크지만 나라가 이런 상황에서 누구에게 꽃을 줄 분위기가 되겠는가”라고 물었다.

양쪽 집회에 모두 참석하는 이도 있었다. 태극기집회에서 애국가를 따라 부르고 묵념을 한 정태순(21)·정희순(17) 형제는 “촛불집회에도 갈 것”이라고 했다. 정태순씨는 “TV뉴스를 보면 방송사마다 서로 다른 얘기를 하기 때문에 현장에 나와서 진실이 무엇인지 제대로 직접 비교해 보고 싶었고 분위기가 어떤지도 확인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헌재 결정이 임박한 3월의 첫 주말, 서울시청 건물 벽에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라는 플래카드가 봄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성호준·강기헌 기자 나영인·조수영 인턴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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