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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대한독립 만세’ 98주년 … 갈라진 민심, 쪼개진 광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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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어제 서울 도심의 광장은 어지럽고 혼돈스러웠다. 98주년 3·1절을 맞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찬성과 반대를 주창하는 두 개의 각기 다른 집회가 세종대로 네거리를 분기점으로 불과 100m를 사이에 두고 열리면서다. 양측이 동원한 100여 개의 확성기를 통해 각기 상반된 구호와 주장, 노래와 선동이 난무했다. 두 집회는 조만간 내려질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 선고를 앞두고 양측의 세 과시 성격이 짙었다.

어제 100m 간격 두고 탄핵 찬반 집회 #두 개의 다른 태극기, 동시에 나부껴 #큰 불상사 없이 끝나 그나마 다행

특이한 건 이날 광장과 대로에 거대한 태극기의 물결이 형성됐다는 점이다. 분명 하나의 태극기 물결이었지만 집회 장소와 참석자 성향에 따라 의미는 극과 극이었다. 세종대로 네거리 남쪽으로 서울광장, 남대문 등에서 휘날린 태극기는 ‘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가 제공한 거였다. 태극기를 나눠주는 탄기국 부스의 테이블보에는 박 대통령의 사진과 함께 ‘촛불은 인민, 태극기는 국민’이라는 문구가 보였다. “헌재의 탄핵 기각이 국민의 명령”이라는 주장도 많았다. 이들의 태극기는 한·미 동맹을 상징하는 성조기와 아주 잘 어울렸다. 50~60대 이상 기성 세대가 주였다. 부산에서 버스로 상경했다는 정모(75)씨는 “한국전쟁 때 의용군으로 부상당했는데 연금이 얼마인 줄 아느냐. 세월호 피해자와 차이가 너무 난다. 억울해서 나왔다”고 말했다.

광화문광장의 태극기에는 노란 리본이 달려 있었다. 세월호 참사를 잊지 말자는 뜻이다. 이건 촛불집회를 주도해 온 ‘박근혜 정권퇴진 비상 국민행동’(국민행동) 표(標)다. 이곳에는 학생과 젊은 층이 많았다. 저녁이 되자 촛불도 켜졌다. 왜 여기 왔느냐고 묻자 한 여고생은 ‘하야가 민심이다. 박근혜 구속’ 등의 스티커를 내밀어 보였다.

한민족의 역사적 기념일에 두 개로 갈린 민심을 목도하는 건 괴롭다. 해방 이후 남과 북으로 쪼개진 것도 억울한데 이번처럼 남과 남이 둘로 갈라져 소 닭 보듯 싸우고 있는 모습을 유관순 열사가 본다면 얼마나 개탄스러울까. 호국 영령, 민주화 열사도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박 대통령의 잘못을 그냥 덮을 수는 없다. 촛불 민심은 배신감이다. 그렇다고 잘못 이상으로 처벌해 또 한 명의 사도세자를 만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진정 태극기 민심이 걱정하는 것 역시 피와 땀으로 일군 조국의 미래이지 박 대통령 한 명을 구하자는 건 아닐 것이다.

이날 광장에서 3·1 만세운동에 참석했던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고 밝힌 치과의사 정모씨가 한 말은 울림이 있다. “지금 상황은 1945년 얄타회담에서 한반도 신탁통치가 결정된 이후 국내 여론이 찬탁과 반탁으로 갈려 결국 한반도 분단으로 이어질 때와 비슷하다.” 실제로 이날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온 구호들은 당시의 혼란상을 연상케 했다. ‘이렇게 대립하다 대한민국이 드넓은 광장에서 길을 잃고 마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기우이길 바랄 뿐이다.

물리적 충돌 우려와는 달리 집회는 불상사 없이 끝났다. 생각이 달라도 이해와 배려, 대화로 해결책을 찾는 데서 민주주의는 시작된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